시간의 축에 갇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늙고 죽고 병들지. 삶을 살다 보면 기쁨이 오고 분노가 오고 사랑이 떠나고, 즐거움도 우리 곁에서 오락가락하지. 이것은 진리와 같이 통용되는 이야기를 두고 하는 말이지. 희노애락을 두고 하는 말이지. 그래서-'그래서'라는 접속어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사람들은 삶에 갇혀서 삶을 위해 살아가지. 이런 보편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별로 논증이 필요하지 않지. '삶' 자체를 두고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고 끝내 실패할 시도지. 그러나 '삶의 방식'을 두고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겠지.

여기, 「인터스텔라」에는 오래 전부터 전승된 인간-남성들의 신화가 있지. 그들은 오랫동안 땅을 정복했고 자기들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온힘을 쏟았지. 그 결과, 땅은 반격을 시작했지. 모래 폭풍이 수없이 몰아쳐서 밀은 멸종되어 버렸고 빛나는 과학 기술은 지구의 저항에 힘도 쓰지 못했지. 그래서-나는 다시 한 번 이 접속사를 쓰는데-미국인들은 우주 탐험을 작정했지. 그들은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에 자리 잡겠다는 심산이었지. 한국인, 유럽인, 아프리카인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지. 나사에서 일하는 미국인들은 행성을 식민지로 '만들거나' 중력을 무찌르고 행성을 정복하기로 작정했지. '이미 살아있는' 생명들을 존속'시키'느냐, 아니면 개체인 사람들을 죽게 하고 인간 종족을 선택할 것이냐. 이것은 물론 중요한 문제지.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겠지. 인간-남성적인 「인터스텔라」의 인물들은 외(外)계인들의 생존, 자기(自己)와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의 생존은 무시하지. 영화가 던지는 화두는 오로지 '자기 생존'이지. 가족들을 살리겠어, 라는 욕구는 '인류의 존속!'이라는 말 아래 굴복될 것에 불과하고 인류는 자기만도 못하지. '사랑'을 말하는 건 여자고, 과학 관련 능력이 있더라도 없다고 치부되어야 하는 여자들은 대의를 이룩하는 데 민폐만 될 뿐이지. 이것들은 너무 보편적인 시각이고 너무 근시안적이지. 그러나 나는 목구멍까지 이런 질문이 차올라도 말을 꺼내지 말아야 옳지. 하지 않으려 한 것을 왜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니까[각주:1].

 


나는 이 영화를 보며 굉장히 답답했는데, 영화 전체의 시각이 편협했다거나 무엇을 안 했다거나 하는 사항에서가 아니라, 영화가, 말하려고 했던 것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SF의 탈을 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건 결국 사랑이지. 신뢰와 믿음, 오래참음과 기다림이기도 하지. 딸은 아버지를 기다리고 아버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딸에게 응답하지. 아들은 아버지를 버렸지만, 딸은 아버지를 기다렸지. 그리고 아버지가 준 해답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했지.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끝까지 헌신했고 결실을 거뒀지. 생존 문제, 지구의 반격, 외계인과 과학 기술 등을 화두로 삼을 수 있겠지만, 그러므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는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겠지. 이것은 수십 번 우려먹혔지만,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지. 나는 「인터스텔라」가 수많은 가치들을 포기하고 사랑을 말하려 했다는 데 유감은 없지. 그러나 이 영화가 가장 겉핥기식의 사랑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는 게 너무 아쉽지.

이 영화는 사랑을 통해 결국 전승을 말하고 싶어 하지. 딸은 결혼해서 자식들을 낳았고 인류는 미국인들의 공로로 구원받았고 딸의 자식들은 또 결혼하겠지. 그래서-세 번째 이 접속사를 쓰는데-인간은 존속되고 위대한 사랑과 희생도 끝없이 이어지겠지. 전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지. 여기서 끝냈다면 좋았겠지.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는 행성에 갇혀 자기를 구해줄 남자를 기다리고 아버지 아닌 남자는 여자를 구하러 찾아가지. 이 장면은 극도의 판타지, 마초이즘을 반영하지. 여자(특히 미인)를 구하고 영웅이 되고 싶은 남성의 심리를 끝까지 드러내면서 「인터스텔라」는 '사랑'으로 포장했던 판타지를 전부 묻어버리지. 판타지는, 모두가 알다시피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하지만 진짜가 될 수 없으니까. 진짜가 아닌 것은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므로. 이게 내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실패했다고 하는 까닭이지.

 


나는 「그래비티」를 떠올렸지. 혹자는 「그래비티」가 재미없다고 했고, 「인터스텔라」가 더 좋다고 했지. 그렇게 느껴진 까닭은 「인터스텔라」가 편했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말하는데, 내게는 「인터스텔라」가 재미없었다는 주장은 다분히 개인적이니까 남들에게 강요할 사항은 아니지만, 「인터스텔라」의 예술성은 「그래비티」의 발끝만큼도 미치지 못하지. 「인터스텔라」의 작품성은 물론 뛰어났지. 영상 기술은 대단했고 음향 또한 완벽했지. 다만, 「인터스텔라」는 예술적이지 않지. 이 말로써 이 글은 끝!


사족 |

    * 덧붙이자면, 마지막 장면에서 '판타지' 운운한 까닭은, 단순히 남성이 여성을 구하러 간다는 점 가지고만 한 말이 아니라 우주 정복과 관련해서 '탐험'의 남근(=상징 체계)성 자체에 문제 제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 또 덧붙이자면, 「그래비티」의 예술성은 작품의 주인공의 성별과 상관없다. '삶을 삶으로 긍정하기, 다시 태어나기.'를 주제 의식으로 잡은 점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그에 비하면 「인터스텔라」는……ㅜ.ㅜ
    * 마지막으로, 마지막 장면을 보고 '우주의 광활함과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려 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작품 전체의 흐름(개척하자! 와와!)을 볼 때 감독이 그렇게까지 생각한 듯싶지 않다.


  1.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 [본문으로]

'[영화]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2. 『The Bluest Eye』와 시간  (1) 2015.05.09

WRITTEN BY
파다고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