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계절의 순환을 보고 부활을 떠올리고 어떤 이들은 똑같은 자연을 보고 카스트 제도를 떠올린다. 전자의 사람들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봄이 오면 싹이 튼다.’ 같은 명제를 주목하고, 후자의 사람들은 끝없이 반복되는 삶의 굴레를 주목하다. 둘 중 무엇이 더 훌륭한 시간관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순환을 이야기하는 자들의 시간관이 여성적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단선적인 시간관을 주장한 자들이 오래 전부터 과거를 어떻게 미개하다고 규정했는지, 어떻게 자연이 여성적이라고 말했는지 주목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토니 모리슨은 가장 푸른 눈에서 위의 세 시간관 중 어느 하나를 말하지 않는다. 토니 모리슨은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되는 자연관에 한 술 더 떠서 단선적 시간관의 폐해를 말한다. 계절이, 세월이 지날수록 더 잔혹하게 인간을 압박한다고 말한다.

 

토니 모리슨은 당연히 그래야 할계절의 역할을 뒤집는다. 이 작품은 가을에서 시작해서 여름으로 끝나야 했다. 동시에, 작품은 여름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가을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기록해야 했다. , 이 작품은 처음과 끝이 맞물려 있다. 일종의 뫼비우스의 띠를 이룩한다.

 

작품의 시작은 가을이어야 한다.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금잔화가 꽃을 피우는 계절도 물론 가을이다. 금잔화는 여름에서 가을에 핀다. ‘농부가 뿌린 씨는 가을에 거두어진다.’ 성서를 인용하자면, 1:1도 아니고 3060100배로 자연은 인간에게 열매를 돌려주어야 한다. 농부는 자연에게 어머니의 마음을 요구하고 더 많은 수확물을 달라고 생떼를 부린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자연은 인간에게 풍요로운 곡식을 주어야 한다. 자연은 곡식뿐 아니라 꽃도 주어야 한다. 이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사실이다.

 

나는, 앞에서 토니 모리슨이 계절의 역기능을 말한다고 했다. 가을 챕터에서는 아직 역기능이 드러나지 않는다. ‘가을에는 단지 꽃이 피지 않았을 뿐이다. 일어나야 했던 일이 일어나지 못했다. 금잔화 씨앗은 싹조차 틔우지 못했고 아기는 태어나지 못했다. 시작 지점에서 결과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이렇게 가을챕터는 뫼비우스의 띠의 시작점이자 마지막 지점이 된다.

 

가을이 이 이야기의 시작점이 되어야 했던 까닭은 또 있다. 미국의 아이들은 8월 말에서 9월 초에 학교에 간다. 미국에서는 모든 학교가 가을에 1학기를 시작함이다. 그래서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고, 등장인물을 소개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그리고 겨울. 화자인 클라우디아의 이야기는 가을부터 나오지만, 주인공인 피콜라의 이야기는 겨울에 시작된다. 겨울이 피콜라의 이야기의 시작점이어야 할 이유 역시 신화적이다. (신화적, 이라 함은 순환하는 자연자체의 신화성을 의미한다.) 세상이 어느 계절에서 발현되었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휘감고 있는) 뒤틀린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보면, 시간 이전의 삶속에서 계절은 영원 속의 봄으로 있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가 시작된 시점은 겨울이다. 기독교의 신, 모음을 몰라 자음만 본 따서 그의 백성이 야훼라고 부르는 신이, 가죽옷을 지어 입혀서 최초의 인간들을 쫓아낸 사건을 생각한다면, 인류가 시작된 계절은 분명 겨울이다. 실제로 최초의 인간들이 쫓겨났을 때가 물리적으로 겨울이 아닐지라도, ‘만 향유했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세상으로 떨어진 경험은 겨울의 과 관련이 있다.

 

가을에 클라우디아의 이야기를 하고, 겨울 중의 겨울에 작품은 피콜라의 혹한을 드러낸다. 장이 붙어 있으니 클라우디아와 피콜라를 비교하기에도 좋다. 난로도 막을 수 없는 겨울의 추위. 잔혹한 계절이 모든 사랑을 무찌르고 압승을 거둔다.

 

그다음은 봄이다. 봄의 역기능이 바로 <> 챕터의 첫 문단에서 드러난다. 겨울 나뭇가지로 두들겨 맞으면 당장은 아프지만, 나중에는 괜찮다. 그러나 봄의 나뭇가지는 연하고 부드러워서, 그리고 탄력 있어서 더 무섭다. 피콜라가 봄에 강간당하고, 봄에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은 다분히 상징적이고 현실적이다. 겨울이 아니라 봄이 사람을 죽인다. 타락한 정치인이나 확고하게 악한 악인은 무섭지 않다. 가장 푸른 눈에서는 가장 의지할 수 있어야 했던 (뒤틀린) 종교가, 가장 가까운 가족이, 봄에, 한 소녀를 짓밟았다. 가장 보호받아야만 하는 소녀를. 겨울에는 다 같이 가난하다. 그러나 봄에는 최소한의 양분이 있기에, 양분을 먹고 살찐 자들과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의 차이(Grade)가 더 확연히 드러난다. 봄의 양분은 더 풍성해지고, 양분이 풍성해질수록 착취는 더 심해진다. 이제 서사는 스스로 여름으로 이어진다.

 

가장 찬란한 계절,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가장 심한 악취가 난다. 여름의 꽃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게 전부다.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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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 때문에 영화를 보지 못한 관계로, 부득이하게 책 이야기를 꺼냅니다. 조별과제 사라져라!! >.<


WRITTEN BY
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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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축에 갇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늙고 죽고 병들지. 삶을 살다 보면 기쁨이 오고 분노가 오고 사랑이 떠나고, 즐거움도 우리 곁에서 오락가락하지. 이것은 진리와 같이 통용되는 이야기를 두고 하는 말이지. 희노애락을 두고 하는 말이지. 그래서-'그래서'라는 접속어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사람들은 삶에 갇혀서 삶을 위해 살아가지. 이런 보편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별로 논증이 필요하지 않지. '삶' 자체를 두고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고 끝내 실패할 시도지. 그러나 '삶의 방식'을 두고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겠지.

여기, 「인터스텔라」에는 오래 전부터 전승된 인간-남성들의 신화가 있지. 그들은 오랫동안 땅을 정복했고 자기들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온힘을 쏟았지. 그 결과, 땅은 반격을 시작했지. 모래 폭풍이 수없이 몰아쳐서 밀은 멸종되어 버렸고 빛나는 과학 기술은 지구의 저항에 힘도 쓰지 못했지. 그래서-나는 다시 한 번 이 접속사를 쓰는데-미국인들은 우주 탐험을 작정했지. 그들은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에 자리 잡겠다는 심산이었지. 한국인, 유럽인, 아프리카인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지. 나사에서 일하는 미국인들은 행성을 식민지로 '만들거나' 중력을 무찌르고 행성을 정복하기로 작정했지. '이미 살아있는' 생명들을 존속'시키'느냐, 아니면 개체인 사람들을 죽게 하고 인간 종족을 선택할 것이냐. 이것은 물론 중요한 문제지.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겠지. 인간-남성적인 「인터스텔라」의 인물들은 외(外)계인들의 생존, 자기(自己)와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의 생존은 무시하지. 영화가 던지는 화두는 오로지 '자기 생존'이지. 가족들을 살리겠어, 라는 욕구는 '인류의 존속!'이라는 말 아래 굴복될 것에 불과하고 인류는 자기만도 못하지. '사랑'을 말하는 건 여자고, 과학 관련 능력이 있더라도 없다고 치부되어야 하는 여자들은 대의를 이룩하는 데 민폐만 될 뿐이지. 이것들은 너무 보편적인 시각이고 너무 근시안적이지. 그러나 나는 목구멍까지 이런 질문이 차올라도 말을 꺼내지 말아야 옳지. 하지 않으려 한 것을 왜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니까[각주:1].

 


나는 이 영화를 보며 굉장히 답답했는데, 영화 전체의 시각이 편협했다거나 무엇을 안 했다거나 하는 사항에서가 아니라, 영화가, 말하려고 했던 것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SF의 탈을 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건 결국 사랑이지. 신뢰와 믿음, 오래참음과 기다림이기도 하지. 딸은 아버지를 기다리고 아버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딸에게 응답하지. 아들은 아버지를 버렸지만, 딸은 아버지를 기다렸지. 그리고 아버지가 준 해답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했지.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끝까지 헌신했고 결실을 거뒀지. 생존 문제, 지구의 반격, 외계인과 과학 기술 등을 화두로 삼을 수 있겠지만, 그러므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는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겠지. 이것은 수십 번 우려먹혔지만,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지. 나는 「인터스텔라」가 수많은 가치들을 포기하고 사랑을 말하려 했다는 데 유감은 없지. 그러나 이 영화가 가장 겉핥기식의 사랑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는 게 너무 아쉽지.

이 영화는 사랑을 통해 결국 전승을 말하고 싶어 하지. 딸은 결혼해서 자식들을 낳았고 인류는 미국인들의 공로로 구원받았고 딸의 자식들은 또 결혼하겠지. 그래서-세 번째 이 접속사를 쓰는데-인간은 존속되고 위대한 사랑과 희생도 끝없이 이어지겠지. 전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지. 여기서 끝냈다면 좋았겠지.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는 행성에 갇혀 자기를 구해줄 남자를 기다리고 아버지 아닌 남자는 여자를 구하러 찾아가지. 이 장면은 극도의 판타지, 마초이즘을 반영하지. 여자(특히 미인)를 구하고 영웅이 되고 싶은 남성의 심리를 끝까지 드러내면서 「인터스텔라」는 '사랑'으로 포장했던 판타지를 전부 묻어버리지. 판타지는, 모두가 알다시피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하지만 진짜가 될 수 없으니까. 진짜가 아닌 것은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므로. 이게 내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실패했다고 하는 까닭이지.

 


나는 「그래비티」를 떠올렸지. 혹자는 「그래비티」가 재미없다고 했고, 「인터스텔라」가 더 좋다고 했지. 그렇게 느껴진 까닭은 「인터스텔라」가 편했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말하는데, 내게는 「인터스텔라」가 재미없었다는 주장은 다분히 개인적이니까 남들에게 강요할 사항은 아니지만, 「인터스텔라」의 예술성은 「그래비티」의 발끝만큼도 미치지 못하지. 「인터스텔라」의 작품성은 물론 뛰어났지. 영상 기술은 대단했고 음향 또한 완벽했지. 다만, 「인터스텔라」는 예술적이지 않지. 이 말로써 이 글은 끝!


사족 |

    * 덧붙이자면, 마지막 장면에서 '판타지' 운운한 까닭은, 단순히 남성이 여성을 구하러 간다는 점 가지고만 한 말이 아니라 우주 정복과 관련해서 '탐험'의 남근(=상징 체계)성 자체에 문제 제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 또 덧붙이자면, 「그래비티」의 예술성은 작품의 주인공의 성별과 상관없다. '삶을 삶으로 긍정하기, 다시 태어나기.'를 주제 의식으로 잡은 점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그에 비하면 「인터스텔라」는……ㅜ.ㅜ
    * 마지막으로, 마지막 장면을 보고 '우주의 광활함과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려 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작품 전체의 흐름(개척하자! 와와!)을 볼 때 감독이 그렇게까지 생각한 듯싶지 않다.


  1.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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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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