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오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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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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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1.
오늘 몇 명의 필진들과 함께 이 시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쟨'님이 가져온 시인데, '프란츠 카프카'라는 독특한 시입니다. 문학가, 철학자들의 이름이 식당의 메뉴처럼 걸려 헐값이 팔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를 공부하는 선생과 제자가 있습니다.
카프카는 삶의 의미에 대해서 묻지 않는 세태에 대해서 실랄하게 꼬집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 조차 800원입니다. 시를 배우겠다는 것은 '미친'일입니다. 이 '미친'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갈렸는데, 하나는 시를 입신양명의 도구로 삼겠다는 '미친'으로 해석할 것인지와, 다른 하나는 시를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달리, 삶의 의미를 찾겠다는 '미친' 인지였습니다. 여러분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 시는 삶의 가치, 의미, 목적을 경제적 수치로 환산하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심지어 문학 마저도 돈 주고 사고 파는 것이 되었다, 뭐 그 말입니다. 우리에게 생각으로는 낯설지 않은 결론입니다. 그러나 삶으로는 언제나 낯선 결론입니다.
이 시를 읽고서 네 사람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기록은, 그 대화 속에서 제가 느꼈던 것들입니다. 그간 홀로 쓰는 글이 어려웠는데, 오늘은 서로의 생각이 맞닿는 지점들이 있어서 훨씬 쉽게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글자로 가득한 숲에서 찾은 의미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
이것에 대해서 '이 숨'씨께서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비슷한 대목을 인용해서 소개했습니다.
시, 미, 낭만, 사랑은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목적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함께 많이 이야기하던 단어였습니다. 텔로스. 목적 그 자체. 그러나 저는 미, 낭만, 사랑은 불충분한 목적이라 생각합니다. 하나의 가치를 전부라고 오해해서, 그 가치를 위해 다른 가치를 말살하는 역사의 장면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에는 6.25에 대해서 써놓았는데, 6.25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산이라는 가치와 자유라는 가치가 부딪칠 때, 양쪽은 목숨을 내던져 서로 죽이는 일에 힘써야 했습니다. 추상명사들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키팅 선생님은 틀렸습니다.
게다가 이미 낭만, 사랑과 같은 추상명사들을 목적 그 자체로 놓고 살아본 경험을 인류는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의 그리스 로마가 그러합니다. 그들이 숭배했던 남신과 여신들이 곧 추상명사였습니다. 에로스를 섬기고, 마르스를 섬기는 것은, 사랑과 힘이라는 추상명사를 섬김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추상명사로는 사람의 목적 그 자체가 될 수 없음을 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가치와 가치의 충돌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치들을 조화롭게 배치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신들의 이야기를 연결해서 만든 하나의 거대 서사입니다. 고대의 그리스, 로마 사람들은 그 추상명사들을 종합하는 큰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것은 추상명사들을 질서있게 배열하려는 인간의 시도였습니다. 베르길리우스가 이 일에 열심을 내어 이 일을 했고,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가치들을 바로 잡아, 로마 황제의 지배를 위해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네 뭐라고요? 우리는 다시 카프카의 시로 돌아옵니다. 가치를 목적 그 자체로 두는 것은, 또다른 가치와의 충돌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가치들을 묶어서 하나의 이야기 안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한 사람이 다수를 지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면,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옵니다. 그것을 부수기 위해 우리는 또다른 가치 하나를 붙들고 싸워야 할 것입니다. 혁명은 이렇게 돌고 돌아 오늘날까지 이어졌습니다.
키팅 선생님의 말에서 쓴 맛을 느낍니다. 사랑, 낭만과 같은 가치를 목적 그 자체로 두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목적 그 자체라는 말은 맹목이란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맹목과 맹목이 부딪치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치를 교통정리해줄 독재자에게 자신의 권리들을 이양했던 것입니다.
문학입니까? 노골적으로 통치에 이용된, 추상명사들을 인격화시켜서 만들어낸 거대 서사를, 우리가 참된 삶의 목적으로 봐야 합니까? 학문적으로 그렇게 부를 순 있다해도, 저는 <아이네이드> 안에 삶의 목적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의 그림자를 희미하게 발견할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3.
김흥호의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0,1,2와 3,4,5,6,7...의 세상이 있다고 말했는데, 0,1,2의 세계와 3,4,5,6,7...의 세계에서는 같은 원리도 다르게 적용됩니다. '더할 수록 커진다', 혹은 '곱할 수록 더 커진다'는 원리같은 것 말입니다. 3,4,5,6,7...의 세계에서는 더할수록 커지고, 곱하면 더 커지지만, 0,1,2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더해도 그대로, 곱하면 작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김흥호는 이것을 형이상의 세계와 형이하의 세계라 설명합니다. 종교의 세계와 과학의 세계라 말하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하늘과 땅의 차이인 것으로 보입니다.
시, 문학, 철학이 가지고 있는 삶의 '의미'가 바로 0,1,2에 속한 것입니다. 즉 형이상의 세계는 사람의 목적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더하고 곱해서 늘리는 것밖에 모르는 형이하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0,1,2는 없는 것처럼. 삶의 의미, 인생의 목적도 3,4,5,6,인것처럼 오해하고서 그렇게 살아간단 말입니다.
아직 6월이니 6.25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의 이론입니다. 유물론이라고 부르는데, 존재하는 것은 물질이 전부라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는 0,1,2를 배격합니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이 이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사람은 0,1,2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의미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절반이 따라간 이 공산주의는 '인민의 물질적 평등'이라는 0,1,2 세계의 원리 중의 하나를 붙잡았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자유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국민의 선택적 자유'라는 0,1,2의 가치 중에 하나를 붙잡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평등과 자유가 총칼을 들고서 맞붙었습니다. 평등도 옳고, 자유도 옳은데 어디 한 쪽 물러설리 없지 않습니까? 사람은 의미없이 살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다시 베르길리우스의 작업을 시작한듯 합니다. 관용이라는 가치의 이름 아래, 다른 가치들이 정돈합니다. 그리고 '관용'을 말하는 사람들이 발언권을 얻습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도 관용의 발 아래 무릎을 꿇었습니다.
0,1,2에 대한 하나된 생각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의 추상명사를 목적 그 자체로 여기는 것은, 결코 하나됨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됨'도 하나의 가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됨을 이루는 것은 또다른 가치가 아닙니다. 인격입니다. 존재입니다. 한 분입니다. 형이상의 가치들과 형이하의 다양한 삶들이 하나될 수 있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의 추상명사에 갖히지 않고, 추상명사들을 넘어선 가치 위의 가치. 그러나 가치라고만 말할 수 없는, 모든 인격이 목적 그 자체로 삶고 닮아가야 할 한 분께 돌아가야 합니다.
대부분 모든 현실 비판은, 하늘의 눈으로 땅을 바라본 것이지만, 마치 바늘 구멍으로 들여다본 하늘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가치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뿐입니다. 그 가치의 근원을 모릅니다. 0,1,2의 관점으로 3,4,5,6,의 세계를 비판하기는 쉽습니다. 하늘과 땅이 다르다는 사실을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0,1,2와 3,4,5,6 의 접점이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세계 전체의 조화를 위해서는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접점이 필요합니다. 차이들을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섞어찌개를 만들 것이 아니라, 차이들을 조화롭게 담지 하고 있는 접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는 접점을 발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0,1,2의 차원에 계신 한 분이, 3으로서(곧 사람으로서), 하늘과 땅의 접점으로서 오셨던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모든 현실 비판은 바로 이 온전하신 3. 하나이자 셋이신 분의 반영입니다. 그는 어떻게 갈라진 두 차원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주기도문으로 치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기"입니다. 그러니 그를 기적을 이루는 신기한 신적 존재라 생각하는 것은, 그를 잘못 읽은 것입니다. 그는 온전한 인간입니다. 0,1,2와 3,4,5,6을 잇는 세상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그 3이후로, 4,5,6,7이 펼쳐집니다. 사람을 통해 이뤄지는 문화, 산업, 학문등 복잡다단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3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사람의 일입니다. 3은 아직 복잡해지기 이전, 그러나 0,1,2와 가장 가까운 숫자. 모든 일의 기본입니다. 사람됨. 그리고 그 사람됨은, 0,1,2의 세계 전체가 구현된 한 사람에게서 이뤄졌습니다. 그러니 이제 배우면 됩니다. 바로 여기에, 4,5,6,7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인 이유가 3에 있습니다. 3은 셋, '셋'은 '서다'에서 왔습니다. 죽은 사람이 일어섰은, 3은 부활입니다. 부활한 사람, 더이상 생존에 붙들리지 않고, 부분적인 0,1,2 에 매달리지 않는, 모든 가치들이 조화롭게 구현된 온전한 인간, 완전한 신.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이들은, 하늘을 알아서 생명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요, 자신의 부활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3의 사람들이, 이 땅을 하나되게 하는 희망입니다.
그리고 시를 배우는 게 왜 미친 일입니까? 배울 수 있겠다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친 일은, 그 인격을 배우겠다고 하는 일입니다. 저 메뉴표에 아예 나와있지도 않은 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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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표식받은 이'님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같다고. 찬양은 우리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고.
그 말이 참으로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가치들을 넘어 계시며, 그것들을 조화롭게 이루시는 한 분. 그 분에 대한 찬양이, 우리를 우리답게 합니다. 나로 하여금 일어서게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 1번도 떠올랐습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오늘 나는 악기. 그를 찬양하는 것이 내 삶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리고 내가 온 몸을 울려 그를 노래할 때, 하늘과 땅이 나를 통해 하나입니다. 나는 조화의 중심, 거기서부터 삶의 다양한 차원이 새로이 열립니다. 진리는 객관적인 추론과 증명으로 얻는 것이 아닌, 온전한 인격과의 만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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