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타를 프로듀스

노부타를 프로듀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얼마지나지 않아 군대에 입대하였다. 05년도 12월에 입대한 후 2년간의 군생활을 마칠 무렵, 나는 전역을 얼마 앞두고 수능을 다시 쳐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군대를 전역한 후 3월 대학 입학식까지 대략 서너 달의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군대를 막 제대하면 이 세상에 어느 것도 무서울 게 없고, 어떤 일이든 주어만 지면 다 할 수 있을 거 같은 반쯤은 미친 상태에 이른다. 나 역시도 그러했고 군대에서 2년간 키워온 어쩌면 눌러온 모든 에너지들을 밤새워 일본드라마(이하 일드)를 보는데 할애했다.





한창 일드를 보던 중 ‘호리키타마키’라는 당시로써는 이제 막 무명의 티를 벗고 유명세의 가도에 진입한 여배우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유치한 것부터 조금은 난해한 것까지 ‘호리키타마키’가 나온 일드라면 다 챙겨보았다(군대에서 2년간 억눌러온 본성을 ‘호리키타마키’라는 여배우에게 쏟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른지도 모른다). 오늘은 그 중 일본 NTV에서 2005년에 10부작으로 방영했던 ‘노부타를 프로듀스’라는 일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까 한다.

이 작품은 소설이 원작인데 한국에서도 ‘들돼지를 프로듀스’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되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봐도 좋겠다. 이 일드에서 앞서 언급한 ‘호리키타마키’는 이지매(왕따)를 당하는 ‘노부타’역으로 출연한다. 그 외에도 국내에서 ‘야마삐’로 유명한 ‘야마시타 토모히사’와 일본 유명 아이돌 ‘캇툰’출신인 ’카메나시 카즈야’가 함께 출연한다. 

이 드라마의 줄거리는 대략 이러하다.



고등학생인 슈지(카메나시 카즈야)는 학교에서 가장 인기 많은 학생이다. 선생님부터 남학생 , 여학생에 이르기까지 학교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를 좋아한다. 그와 같은 학급에는 아키라(야마시타 토모히사)라는 4차원 정신세계를 가진 부자집 도련님과 노부타(호리키타 마키)라고 하는 모두에게 이지매를 당하는 여학생이 함께 학교에 다니고 있다. 슈지는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적절히 친구들을 돕기하도 부탁에도 잘 거절하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은 이미지관리에 대해 스스로를 기특하게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를 느끼고 내면의 갈등을 한다. 그래서 그는 이지매를 당하는 노부타를 보면서 선뜻 나서지 못하고 망설인다. 또 자신의 이미지가 실추할까 싶어 사랑하지 않는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하지도 못한다. 그러던 중 우연치 않은 기회에 아키라와 함께 노부타를 프로듀스하여 이지매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일에 참여한다. 이들은 외부로부터 노부타의 이미지를 바꿔보기 위해 노력하고 내부로부터는 노부타 내면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슈지는 노부타를 프로듀스하는 일을 통해 자신의 내면의 갈등을 정리하고 가치관을 형성하며 정체성을 확립해간다. 동시에 노부타와 아키라 등 슈지의 주변인물들이 함께 성장해 가는 내용이다. 일종의 하이틴성장드라마인 셈이다.

결국 노부타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키라와 슈지의 프로듀싱은 과연 성공하였을까?





이 드라마의 결론부는 근래 대부분의 일드가 그렇듯이 꽤나 현실적인 선택을 하였다. 고전적인 해피엔딩이 아닌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내용으로 막을 내린다. 아직까지 완전한 사회성을 보이지 못하는 노부타를 놔두고 슈지는 갑작스레 전학을 가게 되고 결국 노부타에게는 혼자 해결해야 할 미완의 일들이 숙제로 남게 된다. 그러나 드라마답게 노부타가 앞으로 혼자서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여운을 남긴다. 

개성있는 주제, 탄탄한 스토리, 핫한 배우들 때문이었을까? 이 드라마는 평균시청률이 17%에 달했고, 배우들이 유닛으로 낸 앨범이 그 해 판매 1위를 달성하기도 하였다.

이 드라마가 꽤나 탄탄하고 시사적인 스토리로 성공적인 종영을 한 것만큼 현실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충분히 가능할까? 현실에서도 노부타와 같은 아이들을 프로듀스해서 사회나 공동체에 적응하고 정착하도록 할 수 있을까? 낭만적인 이야기이긴 해도 아마 쉽지는 않을 것이다.

노부타와 같은 친구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이 사회나 공동체에 적응하도록 돕는 일은 가능하냐 어렵냐를 물을 필요도 없을만큼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계산적으로 성공률을 따져 뛰어들지 말지 결정할 문제는 분명 아니다. 그러나 그룹 안에서 어느 한 사람의 이미지를 바꾸고 구성원 전체의 인식을 바꾸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것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이기적이고 권위적이다. 그리고 남보다 낫고 싶어하는 욕구에 쉽게 사로잡힌다. 따라서 어느 집단 안에서 왕따를 당하는 누군가를 보편적인 한 구성원으로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현실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흥미로운 점은 성경에 최초의 왕따(노부타)를 프로듀스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점이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삭개오’라는 세리장을 만난 이야기가 등장한다. 우리나라를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때가 있었듯이 이스라엘도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가슴아픈 때가 있었다. 누가복음 19장이 그러한 배경하에 있다. 삭개오는 이러한 배경하에 로마의 편에서 이스라엘 자국민들에게 세금을 부가하고 거두던 세리장이었다. 일반적으로 세리장은 로마 편에서 세금을 거두고 녹봉을 적지 않게 받아 생활했기에 그들을 향한 이스라엘국민들의 시선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허나 세리장들이 가지는 정말 큰 문제는 이들이 로마가 부과한 세금보다 더 큰 액수를 자국민들에게 부과하기도 했다는데에 있다. 따라서 세리장을 향한 이스라엘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고, 여기에 이방나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인식까지 합쳐져 로마라는 이방에 결탁한 세리장은 원망의 대상이자 국민들로부터 소위 따돌림를 당하는 분위기였다. 대부분의 세리장들은 권력과 돈이 더 중요했기에 이러한 분위기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삭개오는 좀 달랐던 거 같다. 그는 많은 부에도 무언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먹먹함과 공허함이 가슴 한 켠에 있었던 거 같다. 

그러던 중 그는 예수라는 좀 신비한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다. 그는 이스라엘 국민들이 종교적 이유로 기피하는 문둥병자, 세리, 과부 등과 함께 할 뿐 아니라 온갖 신비한 일들을 행하고 병든 사람을 낫게 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들에 삭개오는 그를 꼭 만나고 싶어 했던 거 같다. 때마침 근처에 예수가 온다는 소문을 듣게 되고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갔지만 구름떼같이 몰려온 사람들로 인해서 그의 얼굴조차 볼 수 없게 되자 좌절한다(삭개오는 키가 아주 작았다). 그는 예수를 꼭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예수가 지나갈만한 길목에 미리가서 나무 위에 올라가 기다린다. 생각했던 대로 그는 자신이 숨어있는 나무 아래로 지나간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가 마치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신이 숨어있는 나무 아래에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더니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집에 머물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닌가. 삭개오는 무척이나 놀랐겠지만 또 뛸듯이 기뻤던 거 같다. 그는 기꺼이 예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예수와 교제를 나누었다. 그에게 이 시간들은 황홀했을 것이다. 식사가 끝나가고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그는 놀라운 고백을 한다.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다짐한 것이다. 혹시라도 세리장이라는 직분을 이용해 누군가를 약탈한 일이 있으면 네 배나 변상할 뿐 아니라 앞으로 그러한 일이 절대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이다. 이에 예수는 삭개오도 (로마와 결탁한 세리장임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공표한다. 이 사건으로 사람들은 예수가 더러운 사람과 함께 한다고 수군거렸지만, 적어도 삭개오의 인생에 큰 변화가 생긴것은 분명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프로듀스하셨다. 삭개오가 스스로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다짐할 만큼 예수님의 프로듀싱은 성공적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고리타분하게 누가복음 19장의 구절들을 근거로 예수님의 성공적인 프로듀싱 비법에 대해 설명할 생각은 없다. 분명 삭개오 이야기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메시지들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접촉이다.





서점 종교서적 코너에 가보면 ‘예수님과 함께 한 저녁식사’ 혹은 ‘예수님께서 제공하시는 만찬’ 등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식탁교제를 많이 하셨다는 아이디어에 착안하여, 성경의 이야기들을 풀어가는 책들이 더러있다. 그 중에는 베스트셀러도 몇 권 있는 것으로 안다. 물론 성경에서 예수님의 식사 장면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신학적으로 언약재갱신의 메시지이거나 당시 문화배경안에서 이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실들로 예수님께서 먹을 것을 좋아하셨고, 우리도 식탁 교제를 왕성하게 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그렇게 깊이 있어 보이는 행동은 분명 아닌 거 같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식탁 교제를 통해 사역을 하셨다는 점만은 분명하니 이 점을 아예 무시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시대가 갖는 왕따문화에 대해서 아니 더 나아가서는 이 시대 문화의 기저에 흐르는 이기적인 사회상에 대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단순하지만 강력한 태도가 바로 ‘접촉’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것일수록 진리에 가깝다는 윌리암 오컴의 이야기처럼 아주 단순하지만 강력한 ‘접촉’이라는 태도가 나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총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재학중이지만, (어느 교수님 표현대로) 총신대 천국이 아니다. 전부 교회다니는 사람, 전부 전도사님들이 다니지만 여기 정말 천국이 아니다. 홍합 멍게 같이 생긴 괴물들도 더러 있고, 대부분 중요한 순간에는 타인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기 십상이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내가 불편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쉽게 끊고, 조금만 이상해 보이면 말걸지 않거나 피하는게 당연시 되고 있지 않은가. 타자 혹은 타인과의 소통은 니즈나 자신의 기호에 의할 때가 많다. 불쌍해보이는 누군가에게 측은지심으로 대할 때가 더러 있지만 이 경우도 자신의 영역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자비를 베푸는 게 전부이다. 이러니 아무 득도 안 되고 오히려 미운 짓만 하는 왕따에게 손을 내밀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항하여 타인에게 나의 니즈나 기호, 유익과 상관없이 더 나아가서는 내게 손해가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손을 내미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분명히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말을 걸고 지속적인 관계를 갖고 도움을 주고, 때론 어색하고 지루하더라고 그를 향해 관심을 가지고 철저한 리스너가 되어주는 그런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이 역시도 ‘훈련’이 필요하다.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것이 반복된 좌절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즉 당신의 호의가 보란듯이 거절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당신은 큰 마음으로 호의를 베푼 만큼 적지않은 감정이 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때 마다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계속해서 그를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혹 때로는 당신의 작은 관심에 그가 지나친 관계를 요구해올 수도 있는 일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당신의 일상을 침범하려 들지도 모르겠다. 그런 때에도 긴장을 유지하며,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계속된 접촉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경우를 포함하여 모든 경우에 이것은 반복적인 시행착오를 계속해서 겪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접촉하고 관계를 맺는 일은 끊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글자 좀 나열하여 설명할 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마다 케이스가 다르고, 경우마다 문제가 달라서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인가? 사실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키라와 슈지가 노부타를 프로듀스했듯이,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찾아가셨듯이 우리는 소외된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향하고 다가가고(접촉) 말을 걸어야(관계) 할 것이다. 그 안에서 오는 여러 좌절들(때로는 역으로 무시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나친 관계를 요구하더라도)에도 시행착오를 겪으며 긴장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관계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바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이것이 기본이기 때문에 당연히 지켜져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즉, 신이 인간에게 준 지극히 기본적인 마음이자 인성이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필요없어지는 디지털 세대, 니즈에 의한 디지털 시대를 깨고 아날로그적인 사고로 사람에게 다가갈 때 우리의 지극히 기본적인 인성이 채워지고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우리의 인성을 차곡차곡 훈련시켜 나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WRITTEN BY
파다고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