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특별한 힘이 있다. 울적한 마음을 위로하고, 오히려 더 우울하게 하기도 하며, 기분을 up되게 하기도 한다.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데 음악만큼 좋은 것도 없다.(이글을 쓰면서 치킨이 생각났다..ㅎㅎ왜일까?ㅎㅎ) 그 자극된 감성에 따라서 생각이 변한다. 생각이 변하면 행동도 변하게 된다. 그래서 음악은 대하기 쉽지 않은 것 같다. 

이 어려운 음악이 여행 중에 더욱 힘을 발휘한다. 어떤 음악을 들으며 여행하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확 달라진다.(이건 음식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나는 어떤 음악을 들으며 여행했을까?


내가 여행 중 음악을 듣는 이유는, 나중에 그 음악을 다시 들을때 혹은 우연히 들렸을 때 함께했던 시간과 공간이 느껴진다. 과거의 시점이 현재로 옮겨진다. 그 느낌을 다시 기억하고 싶어서 음악을 듣는다.


부다페스트에서 골목길을 걷다가 어느 음반가게를 발견했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들어가보기로 했다.(까막눈이라 읽을 수는 없다ㅜㅜ)


다양한 장르와 수많은 엘피판과 씨디가 있었다. 심지어 테이프도 있었다. 가게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허락을 받고 몇 장 찍었다. 더 찍고 주인 아저씨(?)랑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분의 표정이 '이 동양 남자애는 뭐지??'라는 표정이어서 다가가기 어려웠다.ㅠㅠ



내가 아는 노래들, 모르는 노래들 정말 많은 노래들이 있었다. 이 많은 노래들은 무엇을 노래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왜 노래하는지도..


나는 무슨 음악을 주로 들을까도 생각해보며 둘러보다가 음반가게인데 가게가 너무 적막이 흘렀다. 그래서 이것저것 고르다가 루이 암스트롱 엘피를 골라서 틀어줄 수 있냐고 했더니 흔쾌히 틀어주셨다.(지금 생각하면 조금 밝은 노래를 틀을껄 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이 여행이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노래를 들으며 가게를 둘러보다가 비틀즈 엘피를 발견했다! 누구나(?) 좋아하는(?) 비틀즈! (이 때 비틀즈의 노래를 들은건 행운이었을까?) 친숙한 노래들이 곁들어지니 더욱 신났다. 왠지 영국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음악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비틀즈!(얼마전에 폴 매카트니가 한국에!!!!! 왔었는데 가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ㅠㅠ)



오늘 얘기하고 싶은 노래는 존레논의 이매진이다.(지금까지 서론이었다ㅎㅎ) 적어도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들어본 노래일 것이다. 이 노래가 유럽여행을 하면서 나와 함께했다.



Imagine there i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s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may say that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이 노래가 유럽 여행을 하며 나와 함께였던 이유는 평소에 좋아하던 노래이기도 했고, 일단 멜로디가 너무 좋았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잡념이 아니라 하나의 시선으로 내 생각들을 모아줬다. 그 생각들은 '하나됨'으로 연결지었다.

이전까지는 몰랐던 이매진의 가사들이 새롭게 들렸고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나되는 세상이라니!!


우리가 사는 세계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그 시작을 존레논은 '천국과 지옥이 없는 것을 상상하자'라고 노래한다. '천국과 지옥'은 종교적 세계관으로 대표되는 하나의 키워드다. 가사에도 나오듯이 종교에서의 탈피를 노래한다. 종교 뿐만 아니라 국가의 경계도 허물어버리는 존레논의 이매진이다. 

우리 삶의 경계(종교, 국가, 윤리, 경제 등)의 기준을 무너뜨리고 하나가 되는 세상을 노래한다. 이것들이 있으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기준이 있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세계1,2차 대전으로 확실히 드러났다. 나와 다른 기준(=이데올로기)을 가진 사람은 '적'이다. 그리고 사람은 여기에 쉽게 현혹당한다.) 사람이 사람을 헤치고, 착취하고,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돌봄'으로 하나가 되자라고 노래한다.


존레논은 '언젠가 너도 우리와 함께하기를 소망한다'고 노래한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로 일어났고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다. 유럽을 가보니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살고있었다. 그들은 삶의 경계가 거의 허물어져있었고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것을 그들은 '존중'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이 존중받고 타인의 삶도 존중하는 삶을 살며, 이 가치를 유산으로 물려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점점 그들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고(신기하다. 너무나 개인적인데 공동체다.) 더욱 더 하나되기를 힘쓴다. 자기의 수입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는 나라도 있고, 실직자가 받는 보조금과 일용직 노동자가 받는 한달치 급여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 나라도 있었다. 그들은 '돌봄'을 실천하고 있었다. 한가지 예로, 신기하게 유럽의 많은 국가들에서 굶어죽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우리가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들은 '권리'로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삶에 대해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가 있었고, 남을 부러워 하지 않을 수 있는 '평등'이 있었다. 또 '신뢰'의 가치가 밑받침되어 있어서 이웃을 믿고, 특별히 국가와 국민 사이에 신뢰가 두텁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많은 세금이지만 아깝지 않고, 그 세금으로 국가가 하는 일은 국민을 위해 하는 일이었다.(최근 미국에서는 너무 많은 세금으로 인해 미국시민권자를 포기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미국과 유럽은 많이 다르다. 이것은 나중에 글을 더 쓰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걱정과 근심이 없는(적어도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는 않더라.) 아름다운 세상이 유럽이었다.(북유럽은 삶의 질 측면에서 지상낙원이라고 부를 정도로 만족도가 높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우리는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아직도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이용하고 착취한다. 돈이 세상을 움직이고 기근과 전쟁이 끊이질 않는다. 이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책은 없어 보인다. 

이 이야기의 해결책은 성경의 아브라함 이야기로 확인이 가능하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시작은 창세기 12장에서 출발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는데, 그 약속은 '나라'에 대한 약속이다. 그런데 이 '나라'는 그전에 먼저 창세기 11장에 나타나는 바벨의 이야기와 대조된다. 사람들은 홍수 사건 이후에도 악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홍수는 악한 사람들을 멸한 것이지 '악'을 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할 수도 있겠다.) 그 악한 마음은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만의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11장 1절은 당시 언어와 말이 하나라고 알려준다. (같은 말과 언어를 공유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의미다.) 이것을 통해 이들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고 그것을 영원히 기념하고자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에게 언어를 혼잡하게 하고 흩어버리신다. 그리고 그 도시는 멈춘다. 

창세기 11장의 나라는 노아 이후의 도시 건설로서(도시를 건설하는 일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저주와 중단으로 마쳐지는데, 창세기 12장의 또 다른 나라는 온 세계 민족의 축복이 된다고 선언한다. 그러면 이 두 나라의 차이점은 창세기 11장의 바벨 사건에서 세워진 나라는 순전히 인간의 힘으로 건설된 인간 왕국이며, 창세기 12:1절의 왕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서' 세우는 철저히 하나님 자신이 세우시는 나라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를 통해 '악'의 근원을 멸하실 것이다.


이야기는 흘러흘러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다. 지금 세계는 다른 언어로 흩어졌던 그들이 다시 하나되기 위해 모이고 있다. 각 사람이 살아온 삶을 통해(역사와 문화) 그동안 언어의 다름으로 인해 생겨났던 각자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를 추구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듯이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가 될 수 없다. 또 다른 '악'의 생산과 '중단'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Imagine'이 필요하다.


(계속)


WRITTEN BY
파다고기

,





2. 착한 그대 : 고난받는 씨알

 


착한 그댄 실패들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없어요

곱이곱이 시련마다 

선택의 지혜가 쌓이죠



  착한 그대들이란 '씨알'이다. 이들은 눈에 뚜렷이 드러나는 '빛남'이나, 다른 사람들의 노동력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힘'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함석헌은 <뜻으로 보는 한국역사>에서, 역사 선생으로서 이 나라에 대해서 무언가 대단하게 드러내 보일만한 것이 없어서 속상했던 때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럼 이 나라에 정녕 아무 것도 없느냐, 그렇지 않다. 고난받는 씨알이 있고, 이들이 이 나라의 주체다. 함석헌은 이 나라를 '수난의 여왕'이라 부르며, 고난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창조될 것이라는 소망을 붙들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도 비슷한데, 400년이 넘는 포로기 역사 속에서(우리나라가 36년간 식민지 생활했던 것의 12배다)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왔던 것은 포로로 끌려갔던 귀족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포로로 끌고갈 가치도 없어서 그 땅에 버려졌던, '땅의 사람들'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오늘날 유대인들의 뿌리가 되었다. 실패들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살몸에 새겨넣는 '착한 그대들'이다. 이들의 고난 속에서 지혜가 날마다 쌓여감은, 이를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낳기 위해서다. 


  이 고난의 시대가 앞에서 말한 '현시대'다. 이 시대가 그런 시대다. 착한 그대들이 고난받을 수 밖에 없는 시대. 씨알이 말하는 질서와 권력이 말하는 질서는 다른 것 같다. 그렇다면 누가 참 질서 안에 서 있는가?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저들이 질서인가? 아니 씨알은 권력을 넘어선 더 큰 질서(아르케)를 안다. 몸으로 안다. 시련 속에서 소망할 수 있음을, 논문으로 써낼 수는 없어도 마음으로 안다. 이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현시대 속에서 착한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현시대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은 온통 돈과 힘이 이기는 약육강식 뿐인데, 그 속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읽기가 피어난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그리고 바로 고난 받는 씨알의 속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읽기에서부터, 현시대가 아닌 새로운 시대가 피어나고 있다. 이 말은 수사가 아니라는 점을 미리 밝힌다. 새로운 시대가 피어나는 것은 엄연하고, 장엄한 현실이지, 말로 끝낼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는 말이다. 그 이유는,



3. fly는 진실로 확실하다! 



fall to fly 



  어쩌면 이 한 줄 가사를 위해서 이 글을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곡이 상투적인 희망노래로 들리지 않는 것은 저 가사 때문이었다. fall. 이 단어를 기독교 신학에서는 '타락'이라 번역한다. 나는 '곤경'이라 쓰고 싶다. 오늘날 인간이 처한 곤경이 'fall'이다.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진리를 알아도 그 진리대로 살 수 없는 작심삼일의 상태. 욕망에 끌려 중요한 것을 습관적으로 놓치는 상태. 그리고 이 상태가 인류 전체를 감염시켰다는 현실이, 오늘 우리가 처한 곤경의 정체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은데, 저 진리를 알지도 못한다는 곤경이다. 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할 줄도 모르며, 이것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그래서 우리 속에서 진리는 우리의 삶과 '달리' 배우기만 하는 것이 되었다. 줄창 배워도 할 수 없고, 심지어 알 수도 없다는 점이 충격적이지 않은가?


  이것을 '악'이라 부르자. 우리는 지금 악의 상태에 빠져(fall)있다. '지정의'의 추락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악에 대해서 물어왔다. 왜 우리는 이러한 상태에 놓여있는가? 왜 우리는 이러한 곤경을 맞게 되었는가? 허나 나는 우리가 왜 fall 되었는지보다 우리가 어찌 fly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왜 악이 존재하는지를 숙고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질문은, '우리는 정말 fly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고난과 곤경을 극복할 수 있을까?'의 물음이다. "'왜' 이 사람이 선천적으로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불행을 겪게 되었습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눈을 뜨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답변을 주셨다. 어? 내 생각이 틀렸다. 예수의 답변은 '어찌 fly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도 아니었다! 나는 곤경을 어찌 해결할지를 얘기하자는 방향으로 글을 쓰고자, 이 생각난 이야기를 인용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 속 진실은, 예수가 최종 목적으로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는 것'이었고,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게 되는 것은 그 최종 목적을 위한 과정으로서 정말 당연한 수순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fly를 정말 믿고 계셨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달리. 의식하지 못한채로, fly를 먼 미래로 밀어놓았던 나와 달리, 그에게 fly는 '지금'이었고, '이제'였다. 고민과 논쟁이 아닌 당장의 실천이었다. 

  아, 이리도 모른다. fly는 안되니까 고민하는게 아니라, 당연한 거니까 고민하는 것이다. 고민 끝에 답을 내릴 문제가 아니라, 이미 답이 나온 문제다.


  그래, 생각을 고쳐먹는다. fly!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fall과 fly를 연결하는 저 'to'는 시간의 흐름을 뜻한다. fall이 시간이 흐르면(to), fly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경우 시간의 흐름을 뜻하는 to는 단단한 'to'다. 반드시 이뤄지는 'to'다. 그래서 목적이나 결과로 해석되는 것이다. 나 우리, 아니 나의 to는 불안하기만 하다. 'fly'를 신뢰하지 못한다. 실패할 것이라 생각한다. 안될 것이라 지레 겁먹는다. 이것은 현시대의 징후다. 나는 올바른 것을 올곧이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거기에 내 모든 것을 걸지 못하고 주저하면서도, 아파한다. 왜 곤경을 극복하는 것을 fly라는 단어를 써서 표현했을지를 생각해보라. fly라고 해서 이승환이 성층권을 뚫고 날아오르길 바라는 것은 아닐것이다. 만일 fly가 이 대지 위에서 발을 떼고, '이 더러운 세상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개인주의적 도피'이지 착한 그대들이 겪는 곤경에 대한 해결이 될 수 없다. 만일 정녕 그러하다면 고비고비 시련마다 선택의 지혜를 쌓을 필요도 없을테니 말이다. 날아오름은 곤경의 극복이다. 그런데 왜 하필 날아오름이냐. 날아오름은 인간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반대 가치들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언가 가치를 추구해야만 살 수 있다. 그런데 대개 '날아오름'에 반대되는 가치들을 추구한다. 이른바 날아오지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잡는 '땅의 가치'들, 자꾸 땅에 붙어있고 싶은 악한 관성이다. 리차드 포스터가, '돈, 권력, 섹스'라고 말했던 그러한 가치들. 거기에 집착하는 바람에 곤경에 스스로(아주 능동적으로) 빠진다. 혹은 김남준 목사가 말했던 '게으름'. 이 악한 관성은 작심삼일과도 밀접한 상관이 있어서, 결국 인간이 올바른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 fly는 이것으로부터의 자유, 날아오름, 곤경의 극복이다. 발을 땅 위에 단단히 붙인채, 내 발에 붙은 지구와 함께 날아오르는 것이다. 


  쓰다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날아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땅의 가치 때문이다' 맞는 말이지? 그런데 이 말은 어떤가? '우리가 땅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유는 날아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맞는 말 같다. 소망없는 현시대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양자택일만이 주어졌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땅의 가치 때문에 날아오르지 못한다고 투정부리는 쪽인가, 아니면 날아오르는 건 없으니 땅의 가치를 추구하는 게 현실적이라 생각하는 쪽인가? 


  가치의 영역에 진공상태는 없어서, 사람에게 아무런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헛된 가치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정말 올바른 가치를 붙잡았다는 뜻이다. 날아오른다는 확신을 얻지 못하면, 저 양자택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어설픈 도덕주의와, 매정한 현실주의 사이에 솟아오르는 길은, 정말 날 수 있다는 확신과 그 확신을 심어주는 탄탄한 근거다. 역사적 근거. 

  이 말은, 그럼 우리는 정말 곤경이 극복될 것을 신뢰해도 된다는 말인가? fly할 것을 믿고, 오늘 우리의 fall을 바라봐도 된다는 소리인가? 만일 이것이 정말 확실하다면, 우리는 fall한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fly를 자연스럽게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신뢰해도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우리는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한 fly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땅의 가치들에 묶인 정도가 아니라, 땅에 집어삼켜졌다가 다시 fly한 한 사람을 알고 있다! 내 블로그를 자주 왔던 사람들은 알겠지. 그렇다! 예수의 부활이다! 그의 부활은 결국 이 세상의 곤경을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표명이요, 그것이 실제로 이뤄짐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니 'fall한 것들이 반드시 fly할 것임을 믿는다'는 말의 정체는 부활에 대한 신뢰다. 그럼 fall과 fly 사이의 to의 굳건함은 신의 굳건함이 된다. 이런 말이 우습지만, 속고 속이는 사람보다 훨신 믿음직스러운 굳건함이다. fly가 드러났으니, 신의 뜻을 단디 붙잡고, fall을 극복해 나간다. 예수의 말 속에서 볼 수 있던 것처럼 fly는 당연한 것이고(오히려 과정이며), 그 fly를 통해 사람을 사람답게, 세상을 세상답게 하시는 한 분이 드러날 것이다. 이것이 세상 모든 fly의 결말이다. '하나'가 드러날 것이다. 


  fall to fly. 그래서 나는 이것이 세례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사람과 세상이 새로워질 것을 믿는 이가 세례를 받고 공동체로 들어온다. 그는 가라앉았다가 올라온다. 곤경에 처한 나는 죽고,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fall to fly를 믿고 살겠다는 온 몸을 던진 다짐이다.


(계속)




WRITTEN BY
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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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지금 찌개집알바생이 아니라 스테이크집알바생이다. 아직은 뚜렷하게 보이는 무언가가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생존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나는 고작 아르바이트지만(이것은 나의 생각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라고 해두자.) 서빙을 하면서, 주방에서 청소를 하면서 너무 기쁘고 즐겁다. 내가 기쁘고 즐겁게 서빙을 하면 손님들도 좋아한다. 주방에서 청소를 깨끗이 하면 손님은 식사를 하면서 위생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나의 '섬김'으로 손님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나의 '몸'을 통해 누군가가 감사와 즐거움을 느낀다. 그런데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가 있을까? 보람없이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생각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몸을 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잠시 학업을 중단하고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을 도전하고 있다. 그 친구는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했고, 정말 표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기대, 사회의 시선, 강요된 구조속에서의 '나'가 아니라, 돈이 목적이 되어서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즐기며 행복해하는 것. 친구와 대화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는 '지친 하루'가 떠올랐다.


(윤종신_2014 월간 윤종신 12월호)


이 영상은 '인쿠르트'에서 광고용으로 사용한 것인데, 
원래 뮤비보다 더 공감이 될 것 같아서 공유한다.


  각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다르겠지만 나는 이것을 '놀이'와 관련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일하는 것은 미덕이고 놀고 쉬는 것은 악덕이라는 가치관 속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일은 신성하고, 인간은 일을 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윤리적 가치판단이 일반화되어 있다. 실제로 인간은 일의 대가로 풍요로운 삶을 영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일과 반대되는 놀이 또는 여가는 생산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호이징가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그는 '놀이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고 한다. 

  원래 놀이와 일은 하나였다. 이것은 '문화'라고도 표현되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람이 주체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 땅 가운데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것이 그분의 영광이 되었다. 하지만 아담의 실패로 모든 것이 왜곡됐고, 특별히 우리가 누리고 다스려야할 '땅'이 저주를 받았다. 우리는 더 이상 주체적일 수 없게 되었고, '하늘'과 '땅'이 분화되고 통제가 생겨났다. 자연스럽게 일과 놀이역시 분리되어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수고하고 땀 흘리는 부정적 의미의 '노동'이 시작되었다. '노동'이 더 이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였다. 말 그대로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한 것일 뿐, 그것으로 충만하기는 어려워진 것이다. 노동이 고되고 힘들어질수록 즐거운 유희, 놀이를 더욱 추구하게 되었다. 

  놀이란, 자고 먹는 활동같이 인간의 생존과 관련이 있는 활동과 '일'에 해당되는 활동을 제외한 신체적·정신적 활동의 모든 것을 말한다. 일정한 목적달성을 위하여 고통을 참아가며 제약된 상황 아래 참여하는 활동은 '일'이다. 반면 놀이는 생활상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무목적적 활동으로서 즐거움과 흥겨움을 안겨주는 가장 자유롭게 해방된 인간활동이다.

  따라서 막연한 휴식은 놀이가 아니다. 놀이는 일정한 육체적·정신적인 활동을 전제로 하며, 정서적 공감력과 정신적 만족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또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재미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즐기고자 하는 의지적인 활동이다. 그러므로 놀이는 재미가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공감력이 있어야 하며, 모든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자유스러움과 놀이 주체의 자발적인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놀이 역시 왜곡되어서, 즐거움만을 쫓는 사람들은 놀이로써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피폐해지고 더 음란해지고 있다. 주체적이었던 사람이 죄로 인해 주체적일 수 없던 때부터 모든 것이 망가졌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셨고, 성육신을 통해 주체적일 수 없는 인간이 주체적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체적 존재가 되어 원래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허락하신 '일'과 '놀이'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들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분께 영광을 드려야한다.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 '일'을 해야한다.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은 마지막 날까지 해야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완성을 바라보는 우리는 '일'을 '놀이'처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이나 '놀이'가 목적이 되는 삶이 아니라 수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일 때 가능하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몸'이 있는 한 '일'과 '놀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피조물인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으며, 자연을 사랑하고 아낄 수 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자기의 맡은바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행위가 가져오는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그 안에서 순수한 즐거움을 추구할 때 인간은 가장 아름답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그렇다면 어떠한 '일'을 해도 괜찮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다' 무슨 일을 해도 좋다. 다만 그것이 '악'한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흔하게(적어도 나의 주변에서는 그렇다.)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을 구분짓는다. 하나님의 일은 교회에서의 봉사, 섬김, 헌신, 예배 등 종교생활이라고 할 수 있고 세상의 일은 말 그대로 생업에 종사하기 위해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종교생활을 '열심히'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사람' 혹은 '은혜받은 자'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반대로, 자기 직업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표식을 은연중에 붙여준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라는 표어 아래 이루어진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이란 무엇일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 땅 가운데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떠한 '일'을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다만 그것이 예배를 드리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면 안된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한다고 한다. 그리고 각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과 '사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짜인가는 생각해봐야한다.

  비전, 소명, 사명이라고 말하는 직업은 대부분 의사, 변호사, 검사, 선생님, 목사, 선교사, 고위직 공무원, 대기업 입사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되고 싶어 하는 직업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택시 운전기사, 음식점, 환경미화원, 농업, 기계 수리공 등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은 직업이 있고 그 직업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만 그런 직업을(사회적 위치가 낮고, 연봉이 적고, 영향력이 없는 직업) 비전과 소명, 혹은 사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다.(내가 아직 오래 안살아서 그럴것이다.) 과연 누군가가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그러한 것일까?(모두 부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

  라고 말한다. 가장 사소하게 생각될 수 있는, 그렇지만 사소하지 않은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일'을 함에도 마찬가지다. 나의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그것은 힘겹고 지겨운 하루하루를 지쳐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몸'을 씀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막힌 '땅'과 '하늘'을 여신 것처럼 우리 역시 '땅'과 '하늘'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해야한다. 그리고 이것은 '생명'으로 이어진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일'을 즐기며,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로 사람을 세우고 살릴 수도 있다. 또 다른 사람은 봉사를 통해 어렵게 살아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이 살아가게끔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 안에 예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 아니다. 결국 '자기 만족' 혹은 '자아 실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살아가게끔 일하신다.(이것을 일반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를 통해 새로운 몸을 입은 사람들이 하는 '일'은 '생명'이요 '충만'이다. 똑같은 '일'을 하지만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바울은 또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 성실하게 하십시오."

  성실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정직함으로 감당하는 가운데 기쁨과 감사가 생긴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 하는 '일'이며, 나는 하나님 나라에 '일꾼'인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할 수록 하나님 나라는 더욱 확장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

노래에 반복되는 구절이 있다.


비교하지마 상관하지마 누가 그게 옳은 길이래

옳은 길 따위는 없는 걸 내가 걷는 이곳이 나의 길


  내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부끄러워 하지 말자! 또 누가 상관한다고 해서 거기에 힘겨워 하지 말자! 어느 직업이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은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이 충만하도록'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부르심이다.

  이 글을 마치고 나는 다시 알바생이 되러 간다. 그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나 즐겁고 값진 시간이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한 식당을 갔는데 그곳의 대부분의 종업원들은 오랫동안 그곳에서 일하신 할아버지들이 많이 계셨다. 그들은 자기의 일을 너무나 즐거워했고 자부심을 가지고 했다. 나도 물론 서빙을 하면서 즐겁고 행복하다. 그렇지만 이것을 평생은 못할 것 같다. 한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는 내가 평생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충만하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싶은 마음이다! 


WRITTEN BY
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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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존재하는 모든 것은 텍스트다. 텍스트라함은 1) 해석을 요구하는 2) 질서잡힌 무언가를 뜻하는 말이다. 지금 이 글이 그렇다. 문법이라는 질서아래 단어들이 놓이고, 이 글은 지금 당신의 해석과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의 육체도 그렇다. 지넘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육체가 두 개의 나선 위에 수놓인 정보들의 집합임을 보지 않았는가. 질서잡힌 정보들의 이해를 통해 우리는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몸만 그러한가? 모든 물질이, 혹은 비물질이, 그리고 우주 전체가 텍스트다. 우주는 신묘한 질서를 가지고, 사람에게 읽기를 요구하고 있다. 과학 마저도 무언가 질서가 있음을 전제하기에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 우주 전체가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텍스트이기에, '읽기'가 있다.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읽는다. 읽을 수 있다 당신처럼 말이다. 무언가 질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질서를 찾고자 서로 다른 것들을 연결하며, 의미를 파고든다. 이질적인 것의 조화를 통해 새로이 질서를 발견한다('새로운 질서'라고 쓰지 않는다. 새로운 질서가 아니라 본래 있던 것이다). 이 '읽는 방식'을 가리켜 세계관이라 부른다. 여럿(세상)과 하나(나) 사이에서 기능하는, 내가 세상을 읽는 방식이다. 세계관을 위장에 비유할 수 있겠다. 우리는 오늘 하루도 이것저것 먹을텐데, 이 이것저것들이 한 위장에서 잘 소화될 때, 우리의 몸과 정신은 그 여럿으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를 보고 듣지만, 그것들을 어찌 읽을지가, 다시 말해 내 정신 속에서 어찌 소화시키는지가, 나의 삶을 (권력들이 드러내는 거짓 질서가 아닌) 참질서 안에 조화롭게 하는 일과 직결될 것이다.


  이 세계관은 이야기의 형태로 표현된다. 그래서 나는 나를 둘러싼 텍스트들을 읽을 때마다, 하나의 이야기를 만난다. 이 이야기는 신으로 시작해서 신으로 끝나는 이야기, 그 속에는 우주와 지구, 그리고 이스라엘과 예수를 지나 오늘 내 삶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이야기다.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다 이 이야기 안에서 각기 의미를 찾는다. 이것이 내가 세상을 읽는 방식이다. 성경 내러티브의 세계관. 이 위장이, 다음의 노래 가사에 어찌 기능하는지를 보여주고 싶다. 이승환의 Fall To Fly란 곡인데, 나의 읽기가 당신과 공명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의 뵘을 드러내고자 한다.






1. '현시대'와 작심삼일




무겁죠 무섭죠 

그대 앞에 놓인 현실이

배운 것과 달리 

깨우침과 달리 

점점 달리 가죠



  성경은 두 개의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현시대', 다른 하나는 '오는 시대'다. '현시대'는 진리가 비웃음을 사고, 정의가 짓밟히는 시대다. 현시대의 잔혹함은 창세기 3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 최초의 부부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인류 최초의 장남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다. 

  

  정말 이상한 지점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선과 악을 판단하며, 올바른 것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실천에 있어서는 그 올바름이 이뤄지지 않는다. 선과 악을 가르는 지혜를 얻고자 뱀의 말을 들었던 사람은, 오늘도 뱀의 소리를 경청하고 있다. 우리 역시 선과 악을 끊임없이 갈라놓지만, 그것이 정말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음에 뱀의 영향력을 느낀다. 이상하지 않은가? 선과 악을 나눠놓는 사람은 많아도, 구별해놓은 선을 온전히 실천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 말을 이루는 사람은 없다는 '현실'이! 현시대다.  


  이것은 '작심삼일'이라는 말로도 잘 드러나는데, 무언가 작심을 했다가도 그것을 실천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누구나' 만나게 된다. 누구나라니! 우리가 올바름을 실천할 수 없기에, 지구가, 세계가, 우리의 관계가, 그리고 내가 병들고 있다. 우리에게 실천력이 없다는 이 아픈 현실이 현시대다. 현시대에 만연한 작심삼일의 무력함은, 세계 전체로 번져나가 우리가 문제라 부르는 일들의 주범이, 사실 우리 자신임을 보여준다. 다이나믹 듀오의 <살인자의 몽타쥬>라는 곡에 나오는, 살인자를 붙잡기 위해 몽타쥬를 그리다보니, 그 얼굴이 결국 자기 자신의 얼굴이었다는 그 가사처럼.


  그래서 '무거운' 것이다.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진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나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이런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올바름을 배우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종교기관에서 우리는 "이것이 올바른거야"라는 소리를 계속 듣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리를 들어도 올바를 수 없다. 우리는 글자마냥 죄다 누워있지, 그 2차원에서 벗어나 일어날 수가 없다. 깨우침과 달리 가는데, 달리가는 무리 중에는 나도 끼어 있다. 


  이 작심삼일의 상태를 인간에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 말하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이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봐서는 안된다. 현시대의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 고통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말해선 안된다. 고통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스러운 것은 고통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왜 우리에게 고통이 있는가? 왜 우리는 이 고통을 고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없는가? 

  작심삼일은 인류의 보편적 상태가 아닌, 인류의 보편적 '실패'다. 우리의 정신과 육체가 따로 놀고 있는 것은 우리가 본래 그래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아는 것을 실천할 수 없어서, 참으로 알지도 못하는 상태. 이것이 성경 이야기가 말하는 죄의 개념이다. 현시대는 이 죄가 만들어낸다. 이승환이 "현실"이라 말한.




알아요 보여요 

끝이 없어 주저앉고픈

일만 하는 나와 

얻지 못한 나의 

고단한 지금들을



  여기에 인간의 절망이 보인다. 이 현시대가 끝이 없어보이니, 주저 앉고만 싶다. 그저 정신의 살림살이는 둘쨰치고, 몸은 건사해야겠으니 사회의 부속이 되어 노동만은 이어간다. 그러면서도 올바른 것을 알아도 실천할 수 있는 진정한 나는 얻지 못했기에, 그저 고단하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노동은 올바른 나와 무관하다. 그래서 지친다.

  변화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할 때, 인간은 덜 아프려고 한다. 집회를 통해서 정부의 방침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을때, 사람들은 시위 장소에 나오지 않으려고 하듯이 말이다. 아프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시대를 극복할 수 없는가? 우리는 끝도 없이 그저 고단하기만 할 뿐인가? 우리는 정말 참된 우리 자신을 얻을 수 없는가? 문제를 뻔히 알고, 보이는 상황이지만, 우리는 어찌할지 모른다. 이 아픔이 끝이 없다고,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아픔을 피하려고만 한다.

  

  이 끝없음의 절망을 이미 석가가 보았다. 무한한 윤회의 수레바퀴 안에 있는 것은 저주 그 자체다. 그래서 그는 이 끝없는 수레바퀴를 벗어나 무(無)로 돌아가자고 했다. 오늘날 '일'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현시대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노동이 오늘날의 '일'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죽기 전까지 굴려야 하는 수레바퀴. 돈 많은 기업들이 정치 권력들을 움직이는 것을 알아도, 우리는 저 기업들의 물건들을 사야 하며, 저 속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아이러니. 허나 수레바퀴를 떠나는 방식으로는, 수레바퀴를 고칠 수는 없을테고, 저 수레바퀴는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고스란히 남겨지게 될 것이다. 고단함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길은 어디에 있는가? 수레바퀴를 피하지 않으면서도, 이 수레바퀴 속 사람들이 실천력을 얻는 길 말이다. 이 길을 찾기 전까지, 우리의 무거움과 무서움은 여전히 우리의 현실일텐데.


(계속)




WRITTEN BY
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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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커스 라이브 워십 7집 "예수의 흔적"

 





 

마커스가 2014년은 한 번쉬구 1년만에 새 앨범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번앨범은 정말 특별한 점이 있다면은

12노래중 11노래가 자작곡이란 것 입니다.

우리나라 노래가 나온거죠 ㅎㅎ

 

 

앨범 리스트입니다

유투브는 마커스 공식 실황영상입니다..

너무 많아서 접어놨어요.. (주의;렉 걸려요..)

 

 

곡의 순서, 분위기 등은

처음4곡까지 빠르고 경쾌한 노래등으로

예배를 여는 느낌이구요,

정말 독특한 5번 노래

"Interlude"

이 부분으로 노래 전체분위를 바꿔

느리고 분위기 있는 곡으로 바뀌었다가

"그는 주" 라는 노래부터

분위기가 밝아지는 느낌입니다.

 

 

이번 앨범 찬양들이 12곡중

"거리마다 기쁨으로" 라는 노래빼고

마커스 자작곡입니다!

 

저는 그래서 첫번째 노래(크신 주 찬양하리)와

 앨범의 타이틀 곡(그는 주),

그리구 제가 좋아하는 노래인

"사랑의 노래되리"

이 셋 찬양으로 가사를 분석하고자 합니다.

 

크신 주 찬양하리의 가사입니다.

 

주께서 택하셨네 우리를 부르셨네 주 백성 삼으셨네
주께서 세우셨네 주의 일 맡기셨네 우릴 인도하시네

주 예수 그리스도 
믿는 자를 통해 일하시는
크신 주 찬양하리 
약한 자 작은 자 
미련한 자 통해 일하시는
크신 주 찬양하리

두려워하지 말라 너흴 인도하리라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하리라

 

이런 가사입니다.

 

"주께서 택하셨네 우리를 부르셨네 주 백성 삼으셨네"

 

우리를 주님께서 택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부르시고 주님의 백성 삼으셨습니다.

 

"주께서 세우셨네 주의 일 맡기셨네 우릴 인도하시네"

 

또한 주님께서 우리를 세우시고,

주님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믿는 자를 통해 일하시는
크신 주 찬양하리" 

 

주 예수 그리스도,

믿는 자를 통해 일하시는

크신 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따라서 크신 주님이지요.

 

 "약한 자 작은 자 
미련한 자 통해 일하시는
크신 주 찬양하리"

 

주님은 또한 약한 자, 작은 자,

그리고 미련한 자를 통해 일하십니다.

정말 인상깊은 가사인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이상대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한 자, 작은자, 그리고 미련한 자를 통하여서

일하십니다. 또한 이러하신 하나님이심으로,

더욱 더 크신 주님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노래 브릿지 부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흴 인도하리라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하리라"

 

이 부분은 가사가 독특하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우리의 크신 주님을

높이고 있었다면,

이 부분에서는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 너흴 인도하리라.

세상 끝날 때 까지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는

주님입니다.

 

가사를 정말 단순하게 풀었지만,

이 노래의 뜻이 더욱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이 노래의 가사에 나오듯이

크신 주님. 약한 자, 작은 자, 미련한 자를 통해

일하시는 분이심으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기 남들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믿는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으로

우리는 좀 더 믿음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의 크신 주님 되심을 인정하게 됩니다.

두려워 하지말고 우릴 인도하시며 세상 끝날 때 까지

같이 계주시는 주님을 더욱 더 강하게 의지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WRITTEN BY
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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