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화려한 유혹 속에서 웃고 있지만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해

외로움에 길들여진 후로
차라리 혼자가 마음편한 것을
어쩌면 너는 아직도 이해 못하지
내가 너를 모르는 것처럼

언제나 선택이란 둘 중에 하나
연인 또는 타인뿐인걸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나의 슬픔을
무심하게 바라만 보는 너

처음으로 난 돌아가야겠어
힘든 건 모두가 다를 게 없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뿐이야
약한 모습 보여서 미안해

하지만 언젠가는 돌아올 거야
휴식이란 그런 거니까
내 마음이 넓어지고 자유로워져
너를 다시 만나면 좋을 거야
처음으로 난 돌아가야겠어
힘든 건 모두가 다를 게 없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뿐이야
약한 모습 보여서 미안해

약한 모습 보여서 미안해

 

https://www.youtube.com/watch?v=_TtV4WEJh2w

( 로이킴이 부른 "서울 이곳은". 로이킴의 오리지날 리메이크 음원이 아니라 어쿠스틱 버전이지만, 나는 이게 더 맘에 든다 )

 

 

0.

오랜만에 쓰는데, 뮤지컬이 아닌 드라마라니. 누군가가 '당신은 연재자의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용돈을 스스로 해결하기 시작하면서, 뮤지컬에 도저히 생활비를 쓸 엄두를 못 내고 있기 때문이죠. 는 핑계일수도 있습니다. 프레스콜로 수많은 뮤지컬 영상을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변명은 그만하고,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응답하라 1988이 아니라, 응답하라 1994라니. 시대를 뒤쳐가도 한참 뒤쳐가는 중임은 인정합니다(심지어 수정중인 지금은, 응팔 마저 끝난 상태) 그러나, 한 번 보기 시작하니 자꾸 보고 싶고, 뒷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매우 좋은 작품임도 인정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왜 응답하라 1994를 지금 보느냐가 아니라 왜 오프더레코드를 하면서 까지 응답하라 1994, 특히나 많은 ost중 '서울, 이곳은'를 다루려는가입니다.

 

1.

응답하라 1994는, 그 유명한 응답하라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입니다. 향수를 일으키는 소재를 중심으로 쫄깃한 갈등들이 펼쳐지다보니, 케이블 드라마로써는 이례적으로 꽤 높은 시청률을 매번 찍습니다.

전작 응답하라 1997은 센세이션급으로 우리나라에 향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매우 흥행했던 전작을 뒤로하고 만드는 후속작은 아마 부담감이 컸을 것입니다. 그런 부담감을 안고 응답하라 1994 제작진들이 선택한 메인테마곡은, '서울 이곳은' 이었습니다.

 

 

 

2.

이제 갓 서울에 상경한 삼천포는, 앞으로의 본 거주지가 될 신촌 하숙집을 찾아갑니다.

나정이네 어머니께서 뭐라뭐라 말해주시지만, 서울 지리가 다 거기서 거기일테니, 일단 찾아가보기로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서울역 지하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신촌행 열차는 오지 않고, 애꿎은 청량리행 열차만 계속 들어옵니다.

 

초조해진 삼천포는, 옆 자리에 앉은 아저씨께 '서울사람 다운 온화한 미소'를 건네며, 여쭙기를 시도합니다.

"저.. 저기.. 신촌행 열차는 언제와요?"

당황하신 아저씨에게, 삼천포는 '서울사람다운 나긋나긋한 억양'을 구사하며, 다시 여쭙기를 시도합니다.

"제가 신촌을 갈려고 하는데요.

(눈알을 굴리며) 지금까지 의정부 북부행 열차 세 번, 청량리행 열차 두 번,

의정부행 열차, (한숨을 쉬며) 또 세 번, 청량리행 열차 한↗버언↘..

신촌행 열차는 도대체 언제..

...언제 와요?"

 

아저씨로 부터 신촌행 열차가 따로 없음을, 아무거나 타서 시청역에서 내린 뒤 2호선으로 갈아타야 한다는 정보를 들은 삼천포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전철을 타도 산 넘어 산 입니다.

환승은 왜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서 이루어지는 건지, 택시는 왜 안쪽까지 안들어가는지.. 야속하게도 서울 지하철은, 삼천포에게 어렵기만 합니다.

 

3.

고생 고생 끝에 신촌역까지 다다른 삼천포에게, 또다른 시련이 찾아옵니다. 급한 마음에 일단 아무 출구나 찾아 밖으로 나왔더니, 자신이 찾던 그레이스 백화점을 가려면 아까 나왔던 그 출구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신촌역만 가면 모든게 해결될 줄 알았는데, 난관에 봉착한 삼천포는 갑갑한 마음을 안고 다시 왔던 출구로 되돌아갑니다. 

그 극적인 상황에서 울려퍼지던 음악은 '서울, 이곳은' 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마치 삼천포가 하려던 대사를 대신 해주는 듯, 노래 선곡은 아주 탁월했습니다. 낯선 환경에 이리저리 시달려 지치고, 타지에 홀로 있는 외로움을 제대로 반영해주는 가사와 어쩐지 쓸쓸하게 들리는 멜로디. 거기에 로이킴의 따뜻한 목소리는 금상첨화입니다.

'서울, 이곳은'은 공감을 얻고자 하는 대상이 매우 뚜렷한 노래입니다. 바로 새로운 환경에 초조함을 느끼고 여유를 가지지 못 하는 그러한 사람들이 그것입니다. 노래의 화자는, 계속해서 돌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쩐지 낯선 환경에 패기있게 도전했다가 적응하기를 실패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고백인 것으로 들립니다. 삼천포는 과연 삼천포에서도 초조하게 길을 헤맸을까요? 아니, 오히려 여유롭게 지름길로 갔을 것입니다. 본래 길치가 아닌 삼천포가 어리버리한 길치로 변해버린 것은, 본인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달라진 서울환경 탓에 여유를 잃어버린 까닭입니다.

 

4.

세태의 변화가 빠르고, 뒤쳐지면 도태되는 이 시대에서 이러한 노래는 우리에게 더욱 공감을 줍니다. 가만히 있어도 자고 일어나면 흐름이 바뀌어있는 이 세상에서는, 날로날로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느라 초조함에 휩싸여 여유로움을 찾기란 너무 힘듭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보여서, 내 자신이 너무 부족해서 일어난 일인가 싶어 자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더더욱이 주변인들의 기대를 안고 떠나온 케이스라면, 그 사람들의 기대에 대한 미안함도 더합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절대 본인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천포가 길을 잃은 것은 낯선 서울 환경에서 길을 찾느라 여유로움을 잃어버린 까닭입니다. 삼천포가 지하철에 익숙하고 환승에 익숙했다면, 10시간이 아니라 1시간 만에 하숙집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시간 만에 하숙집에 도착하는 그 날이 오기 위해서는 단 한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너무 빠르게 바뀌어버려 적응하기 힘든, 내가 처한 그 상황을 무조건 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입니다. 삼천포가 서울 지하철에 익숙하기 까지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자신을 이렇게 자괴감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환경임을 인식하고, 그 초조함에서부터 자유로워져 여유를 되찾으려 노력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 '초조함'에서 '여유로움'으로 가기 까지의 과정은 좀 다를 수도 있습니다. 노래의 화자와 삼천포는 둘 다 낯선 서울 살이에 지친 상태로, 같은 상황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러나 둘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노래의 화자는 휴식을 가지고 '내 마음이 넓어지고 여유로워져 너를 다시 만나기'를 선택하였고, 삼천포는 '미우나 고우나 서울에 남아 하숙하기'를 선택하였습니다. (물론 삼천포가 삼천포로 돌아갈지, 서울에 남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였는지 극 중에는 나오지 않지만, 분명히 때려치고 내려가고 싶다는 고민이 들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선택은 이분법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서, 어느 한 쪽이 옳은 결정이라고 말 할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각 선택에 대한 한계점은 분명 존재합니다. 휴식을 가진다 해도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피하려고 했던 그 상황에 다시 마주쳐 같은 어려움에 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남아있기를 선택한다 하여도 돌파하는 과정 가운데에 심신이 지쳐 번아웃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 한계 또한 자신의 선택임을 인식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해도 분명 좋은 경험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상황을 압도하면,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상황은 누리고자 있는 것이지, 휘둘리고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도 우릴 묶을 수는 없고, 인간은 그저 묶이기만 하도록 지어진 존재도 아닙니다. 그러한 상황이 닥칠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와 이 상황이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가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명확하게 알 수록, 우리는 스스로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탓이 아니었구나!'

 

 

p.s. 자꾸 제가 길치인 것에 대한 해명글처럼 보이지만, 그건 절대 아닙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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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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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기

 이 글은 우연히 불교대학에 다니게 된 한 크리스찬 청년이 쓴 글이다. 글의 바탕은 김복옥 교수님의 ‘불교적 관점에서 본 여성사회’라는 강의에 있다. 나는 그저 이 강의를 정리하며 나의 생각과 느낌을 있는 그대로 적을 뿐이다. 글 연재의 앞서 나에 대해서 소개하면 난 불교대학에 다니지만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이다. 불교에 대에서는 그저 ‘부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가볍게 읽고 자신의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소통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1. 불교란?

 불교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난 불교란 ‘부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강의에선 불교는 ‘행복론’이라고 한다. 삶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고, 행복이란 좋은 느낌 혹은 정서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 강의가 ‘불교이론’을 공부하는 강좌가 아니기에 불교에 대한 정의는 여기까지 다루었다. 하지만 불교를 ‘행복론’이라고 간략하게 요약한 만큼 불교에선 행복을 중요시 하는 것 같았다.


2. 부처의 생애

   사실 이 강의에서 매우 흥미롭게 공부한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다룰 내용이 많지만 이 역시도 ‘불교적 관점’을 배우기 위한 과정이기에 강의에선 간략하게 다루었다. 부처의 생애는 총 8장의 부처가 나온 사진을 통해서 다룰 것이다. 부처의 이름은 싯탈타(고타마 싯다르타)이며 정반왕(‘깨끗한 밥’의 의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반왕의 부인의 이름은 마야이다.

<도솔래의상>

  도솔래의상은 싯달타 태자의 ‘태몽’을 의미하는 그림인다. 저 침상 위의 여자가 마야 부인이며 우측의 하얀 코끼리를 탄 인물은 바로 부처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코끼리는 불교의 시작에서부터 등장하게 되며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주 : 다. 서, '침상'고, '측'만, .


<비람강생상>


  <비람강생상>은 부처가 태어나는 장면이다. (마치 숨은 부처 찾기처럼 부처는 숨어있다. 한 번 찾아보길 권한다.) 부처는 마야 부인의 겨드랑이 아래인 옆구리에 있다. 그렇다 바로 옆구리로 해산하는 장면이다. 왜 이렇게 해산하게 될까? 답은 바로 인도의 계급에 있다. 기원전 1500년 경 아리아인들이 유럽에서 오게 된다.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매우 강력한 철기를 갖고 오게 된다. 그러니 인도 및 여러 나라는 침략당할 수밖에... 철기라는 문명도 갖고 들어와 지배하지만 한편으론 ‘브라만 교’라는 종교를 갖고 들어온다. 결국 기존의 인도의 계급위에 브라만이라는 아리아 인의 계급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이 계급에 해당한는 사람은 존귀하다고 여겨졌고, 태어나는 곳 또한 다르다고 한다. 인도의 계급에 따라 차례로 소개하면, 최사위의 계급 브라만은 머리, 기존 인도의 왕족에 해당하는 크샤트리아는 옆구리, 그 아래 계급인 수드라는 배꼽, 가장 낮은 계급인 바이샤는 발 아래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다시 싯달타로 돌아가면, 싯달타는 태어나고 바로 7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을 말했다고 한다. 그 뜻은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 라는 뜻인데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는 존귀하다.’고 해석한다.

<사문유관상>

  <사문유관상>은 4개의 문으로 나가서 국민의 삶을 봄 이라는 뜻이다. 앞서 말했듯이 싯달타는 태자이다. 즉 왕의 아들이다. 게다가 정반왕의 유일한 아들이여서 향 후 왕위를 위임 받을 핏줄이다. 때문에 항상 좋은 것만 보고 먹고 하였다.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건강해 보인다. (사진의 주황색 옷을 입고 있는 인물) 4개의 문은 동서남북의 문이다. <사문유관상>은 처음으로 동대문을 나갔을 때 ‘노인’을 보게 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바닥의 노인은 보다시피 많이 여위었다. 처음으로 싯달타는 자신의 비해서 상당히 여윈 모습을 보며 옆의 싯달타를 모시는 이한테 물었다. 

‘나도 노인이 되는가?’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노인이 됩니다.’
싯달타는 두려움에 다시 궁궐로 갔다.
그리고 이번엔 남쪽으로 가서 처음 ‘병든 자’를 보게 된다. 그때도 물었다.
‘나도 병에 드나?’
‘그렇습니다. 사람은 병에 들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두려움에 떨었다.
그 후에 이번엔 서쪽으로 갔다. 그곳에선 ‘상여’를 매고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때도 싯달타는
‘왜 사람은 죽는가?’
‘사람은 늙어서 죽습니다.’
‘나도 늙는가?’
‘그렇습니다.’
싯달타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북쪽으로 향한다. 이곳에서는 ‘수행자’를 본다. 이에 싯달타는
‘왜 우리와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는가?’
‘이들은 수행자여서 그럽니다.’
‘뭘 위해 수행을 하는가?’
‘이들은 늙어서 죽게되는 것에 대해 수행합니다.’
‘나도 수행하면 안 죽을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깨달으면 안 죽습니다.’
이후 싯달타는 궁궐을 떠나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여기서 태자의 고민이 구체화 된다.

‘난 죽지만 죽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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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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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8~25

  십자가의 로고스가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일이지만,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무너뜨리겠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겠다.

  어디에 지혜자가 있습니까? 어디에 문법학자가 있습니까? 어디에 현시대를 대변할 논객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이 코스모스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을 알지 못합니까? 즉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코스모스는 지혜를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케리그마의 어리석음으로 신실한 이들 구원하시기를 좋게 생각하십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찾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의 메시아를 전합니다,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그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메시아는 하나님의 힘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 유명한 본문이 나오기까지 고린도전서의 맥락을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온갖 언변, 지식, 영적 은사로 풍성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분열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에 따라 편을 나누고, 각 편은 저 언변, 지식, 영적 은사를 자신들의 정당성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린도는 말 잘하는 '유명인'을 배출하고, 너도 나도 그렇게 되고자 했던 고린도 도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메시아의 하나됨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됨이란 말로 하나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고린도에 말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지만, 그렇다고 에클레시아가 말을 중심으로 모이는 철학학파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고린도 사람들은 오해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바울이 말로서 전하고자 한 것은 복음이고, 이것은 말로 하는 철학이 아니라, 메시아 십자가의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몬운은 이 '메시아 십자가의 힘'에 대한 상술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지혜'에 관한 것이 아니라 말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음'에 관한 것이며, 말로 구성하는 지혜라기 보다는 힘입니다. 그리고는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암시하는 구절을 인용합니다.

이사야 29:14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내용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던 언약백성 이스라엘은 맹인이 됩니다. 눈이 있어 성경을 보아도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깊이 잠들게 하는 영"(10)을 부어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십니다. 그리고 반전이 14절입니다.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이 등장합니다. 그 일로 인해 지혜자의 지혜가 무색하게 되고, 명철자의 총명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됩니다.

  바울은 이미 다른 편지에서 이사야 29장을 인용한적이 있습니다. 바로 로마서 9장입니다. 저 지혜자와 명철자에 대한 언급 뒤에는 그 유명한 토기장이 비유가 나옵니다. 저는 로마서 9장과 고린도전서 1장이 같은 의식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1) 기이한 일 2) 지혜자들의 지혜가 가려짐 3) 토기장이 비유 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고 흐름이 로마서 9장에도 반영되어 있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고린도전서 1장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사고의 흐름이 아니라, 이미 이사야나 예레미야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8:9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이렇듯 예레미야에서도 2) 멸망당하는 지혜자들이 나오고, 뒤로 넘겨서 18장부터는 3) 토기장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기이한 일에 대해서는 31장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다소 벗어나는 얘기입니다만, 저 주제들에 따라 이사야, 예레미야, 로마서, 고린도전서의 본문을 발췌하고 그 속에서 동일한 사고의 흐름을 찾아보는 접근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왜 세상의 지혜가 멸망당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왜 이 때마다 토기장이는 등장하는 것일까요? 구약이 예고했고 신약이 이미 벌어졌다고 말하는 기이한 사건이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요?

1) 지혜의 멸망
2) 토기장이 비유의 의미
3) 마침내 벌어진 기이한 일


  앞으로 이 주제들에 따라서 본문을 펼쳐 놓고서 함께 생각해봅시다. 고린도전서를 잠시 떠나서 말입니다. 사실 떠난게 아니죠. 저 얘기가 고린도전서의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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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천한 자가 나름 이해해보겠다고 이 아침에 성경을 풀어 적어보았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분명한 것은, 저 첫 줄에 "내 형제자매들이여"를 읽었을 때, 바울은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귓가에 속삭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령으로 연결된 바울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글자를 전달함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우리가 연대하고 있음을 글자를 통해 확인할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26~31
내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의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있는 사람'이라고 할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힘있는 사람도 없었고, 귀족으로 태어나 출신 배경이 좋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있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 기준으로 볼 때 힘없고, 출신 배경도 없고, 지혜 없는 이들을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마치 출애굽했던 히브리 노예들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택하셨으니, 힘있는 자들의 힘을 폐하시려고 심지어 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신실한 사람들을 새로이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떠한 피조물도 그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누구인지가 분명합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은 메시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 메시아가 우리를 위해 '지혜, 즉 하나님의 인격적 임재'가 되셨고(이것이 지혜의 바른 의미입니다.), 또한 '올바름'과 '구별됨'과 '풀려남'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에 기록된대로 "누구든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히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뚜렷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이 새로이 창조된 것입니다.

  풀이를 저녁 때 써보려고 합니다. 오늘 하루 이 구절들을 씹고 맛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걸음 걸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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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0~17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이제 나는 우리 주 메시아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해야 하고,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어야 하며, 같은 생각과 같은 지식으로 온전히 하나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제 바울이 모든 메시아 예수의 에클레시아에 은혜와 평화를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초대 교회 공동체가 문제가 없이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었다가, 그것이 나중에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쉽지만, 오늘 우리가 보는 편지에서는, 이미 서로 다른 사람들이 메시아의 이름으로 하나된다는 것은 퍼즐조각이 불협화음 없이 딱 들어맞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을 붙잡고, 매순간 선택의 순간 속에서 깨어있어야 하는 일이었고,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말, 같은 생각, 같은 지식을 갖는다고 해서 다양성이 사라지고 획일화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집단이든 그 집단은 공유하는 말과 생각과 지식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들이 하나됨을 위해 섬기는 것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제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말과 생각이 하나되었으나 잘못된 지식 때문에 참된 하나를 이루지 못한 것이 바벨탑입니다. 그러나 오순절날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오셨을 때, 그들은 새로운 언어를 받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지식으로 바벨의 추악한 역사가 뒤집혔습니다. 따라서 에클레시아는 성령을 말하고, 성령을 생각하며, 성령을 통해 얻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성령은 바벨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입니다. 그 성령으로 숨 쉬는 에클레시아가, 온전한 하나됨을 이 땅에 구현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글로에의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분쟁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내게 생생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내가 하려는 말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각각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메시아 편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문제를 더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지금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분열하고 있습니다. 분열은 중심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중심은 하나여야 합니다. 둘 일 수 없습니다. 가운데 중(中)이 보여주듯, 위로부터 아래로 꿰뚫린 것은 하나 뿐입니다. 그런데 거짓 중심은 여럿입니다. 이 거짓 중심을 보여주는 말이 "편"이라는 말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바울 편이라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개척한 사람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아볼로 편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이 아볼로에 대해서 사도행전 18장에서 이미 살펴보고 왔습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로부터 진정한 중심에 대해서 배운 아볼로는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섬기기 위해 아가야로 떠났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 아볼로는, 고린도에서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그를 거짓된 중심삼는 사람들 마저 생겨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군가는 베드로 편이라 말합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와 베드로가 어떠한 관계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메시아 편이라고 합니다. 그런 이 사람들은 옳은 것입니까? 메시아라는 말 뒤에는 '편'을 붙일 수 없습니다. 메시아가 하나됨의 이름인데, 이 하나의 이름으로 분열을 낳는 교묘함이 '메시아 편'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습니다. 아마도 '메시아'라는 이름을 내걸고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야구경기가 생각났습니다. 편을 나누어 서로 주도권 경쟁을 하는 구도 말입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게다가 에클레시아에 속한 이들은 주도권을 가지고 싸워야 할 경쟁상대들도 아닙니다. 당시 고린도는 그리스 로마 철학의 홍수였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제자를 삼으며 철학 학파를 만드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말을 가지고 하는 경쟁이었고, '어디가 강한 팀인가'는 오늘날처럼 사람들의 관심거리였습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자신들을 말을 가지고 경쟁해야 하는 철학학파로 오해한듯 합니다.


  메시아께서 나뉘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달렸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따라서 여러분 가운데 누구도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스데바나와 그의 가족들에게도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 외에는, 내가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모릅니다.) 요점은 이렇습니다. 메시아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지혜의 말로 하지 않았으니, 만일 지혜의 말로 한다면 메시아의 십자가는 그 능력을 잃을 것입니다.


  이러한 분열에 대해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에클레시아의 방법은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말을 가지고 주도권을 얻으려는 철학학파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를 세례와 연결시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 '세례'에 대해서 바울은 설명할 것이지만, 그 전에 이미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를 '편'으로 오해해선 안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세례는 세례를 베풀어준 사람의 제자가 되어서 그들끼리의 분파를 만들라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십자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례는 죽고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고 사는데 '생존'과 '편나눔'은 같이 죽어버립니다. 세례받은 이에게 이것들은 추구할 바가 못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보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났던 회당장 그리스보가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리스보가 바울편인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세례는 생사(生死)가 아닌 사생(死生)을 위해 받는 것이요, 이것은 편나눔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은혜를 베푸사 진정한 하나됨을 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복음으로 편을 나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십자가로 살아가는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그저 세상의 철학 학파중 하나로, 스포츠 팀의 하나로 전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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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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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사도행전을 이쯤 살펴보고 이제 고린도전서로 들어갑니다. 바울이 고린도와 그 근처인 에베소에서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 우리는 이미 충분히 살펴봤습니다. 머리 속으로 그의 여정을 그려놓고, 이제 그의 글 속에서 우리가 상상했던 바울이 맞는지 확인할 차례입니다.


고린도전서 1:1~9

&nbsp; 하나님의 뜻에 따라 메시아 예수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과 우리 형제 소스데네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에 이 편지를 보냅니다. 여러분은 각처에서 메시아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메시아 예수 안에서 거룩해졌고, 거룩함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그이는 우리뿐 아니라 그들의 주도 되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메시아 주 예수로부터 은혜과&nbsp;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일단 소스데네가 보입니다. 이 사람은 사도행전 18장에 나온, 바울을 갈리오에게 고발하려고 사람들을 선동했던 회당장 소스데네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자신을 고발하려고 했던 이를 형제라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에 있는 '에클레시아'에 편지를 보냅니다. 아마도 이 편지는 세 번째 편지일 것입니다. 이미 고린도와 바울은 여러 차례 편지를 교환한 흔적들이 있습니다.(5:9, 7:1) 바울은 에베소에서 머물면서 근처 아가야 지역에 있는 고린도의 에클레시아와 편지를 교환했을 것입니다. 수신자를 고린도의 '에클레시아'로 원어를 가져다 쓴 것은, 이것을 '공동체'로 번역하기에도, '교회'로 번역하기에도 성이 차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클레시아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공동 생활을 하며 서로의 재산을 함께 사용합니다. 오늘날 교회와도 사뭋 다르고, 그렇다고 그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라고만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시 이 사람들의 독특함을 살려 그저 에클레시아라 일단 명명하겠습니다.

  본문에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표현은 계약관계를 전제합니다. 즉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특정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때, 그와 '언약'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언약에 신실함으로 반응함으로써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창세기 12장의 바로 앞 장이 바벨탑인 것을 기억한다면, 이는 실로 충격적인 관계의 전환입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원수 삼고 대적하던 장에서, 한 장 넘기고 나니, 사람이 부르심을 받고서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관계로 들어가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이스라엘의 토라 이야기에 대해서 잘 몰랐을테지만, 그렇다고 계약도 희미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린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도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특정한 계약 관계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 계약이란 복잡하고 다층적이지만, 고린도전서 첫 장에서 바울이 표현하는 바를 따르자면, '메시아 예수를 통한 거룩함'이라 요약할 수 있습니다. 거룩함은 '따로 떨어뜨려 놓는다'는 말입니다. 즉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무언가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왔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무엇으로부터 따로 떨어지게 된 것일까요? 바로 이집트에서의 우상숭배하던 삶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비인간화로부터 이 사람들은 출애굽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거룩해질 것입니다. 죄로부터 떨어져 나가 점점 하나님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계약의 내용입니다. 메시아 예수를 통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되었고, 되어가고 있으며, 마침내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고린도의 에클레시아 뿐만 아니라, 전세계 곳곳마다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듣는 거리마다 기쁨으로 춤을 춥니다. 메시아 예수는 그들만의 주가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불러 거룩함에 이르는 모든 이들의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메시아 예수를 통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전세계를 연결합니다. 이들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 세계에 퍼져있는 이 에클레시아들에게 은혜와 평화를 주십니다.

 ​ 나는 늘 여러분을 두고, 메시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두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그이 안에서 모든 것, 곧 온갖 언변과 지식이 풍성해졌습니다. 메시아의 증거가 여러분 안에 세워졌기에, 여러분은 어떤 영적 은사에도 부족함 없이 메시아 우리 주 예수께서 나타나시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이가 끝까지 여러분을 올바로 세우셔서, 메시아 우리 주 예수의 날에 흠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 아들, 메시아 우리 주 예수와의 '코이노니아'를 위해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의 뒷 쪽을 보면 알겠지만, 고린도의 에클레시아는 이 '은혜'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점이 있었고, 이로 인해서 '평화'가 깨졌습니다. 바울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번째 문단을 읽으면, 뒤에 이어질 문제들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문제는 바울이 쓴 그대로 1. 온갖 언변 2. 지식 3. 은사 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들을 풀어내기 전에 감사부터 합니다. 그들이 비록 말과 지식과 은사에 대해서 문제를 겪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거저 받은 말과 지식과 은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래부터 부정하다고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균형을 이루느냐,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바울은 메시아의 증거가 여러분 안에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이 증거가 무엇일까요? 저는 성령이라 생각합니다. 메시아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 하나님 계심의 근거 중에 그 보다 강력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 성령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 성령 계심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문제를 겪더라도 그 문제를 바로 잡고,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실 것을 갈망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그들은 올바로 세워지고, 마침내 메시아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 그들을 완전하게 하시리라 기대합니다. 이 일이 지금은 요원해보일지라도 반드시 이뤄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계약의 내용이며, 하나님은 계약에 충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계약에 충실하신 이가 아들 메시아 예수를 보내시고, 그 아들의 승천에 이어 성령을 보내심은, 하나님과 에클레시아의 코이노니아 때문입니다. 이 말을 잘 곱씹어 보시기 바랍니다. 코이노니아는 '교제'라 번역되었습니다. 내 것 네 것 하지 않고 서로 같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에클레시아와 성령으로 하나되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에클레시아를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를 보니, 이 언약의 내용이 확실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의 짧은 서두에 아홉번이나 반복하는 그 이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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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12

대소동이 가라앉자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오게 했다. 그는 그들을 격려하고 작별 인사를 한 후에 마케도니아로 가려고 나섰다. 그는 그 지방을 지나면서 많은 말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리스에 도착하자 그곳에서 석 달을 머물렀다. 그는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가려고 했지만,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며서 마케도니아를 거쳐 돌아가기로 했다.


  3년간 정들었던 에베소를 떠나,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에 오르는 긴 여정에 오릅니다.  에베소를 떠나기 전에 에베소에서 만난 제자들을 불러, 이 마술과 우상의 땅에서 복음으로 살기로 한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그의 이동경로를 살펴봅시다. 지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마케도니아 쪽으로 가고자 합니다. 마케도니아로 올라가는 길에는 드로아라는 도시가 있는데,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로 보낸 디도와 드로아에서 만나서 함께 움직이기로 했습니다.(고린도후서 2:12,13) 그러나 만나지 못하고 홀로 마케도니아로 떠납니다. 마케도니아는 에게해 윗쪽 지방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데살로니가와 빌립보가 그 지역에 속해 있습니다. 바울은 이 공동체들에 들러 그들을 격려하고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해 아가야로 갑니다.


  이 아가야 지역에는 고린도와 아테네가 있습니다. 이 시절 쓰인 편지가 고린도후서와 로마서입니다. 이미 고린도전서는 전해졌고, 이 편지로 인해 고린도 공동체는 여러 잘못된 부분들을 바로 잡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의 마음은 가벼웠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심경을 담아 고린도에 두 번째 보냅니다. 그것이 고린도후서입니다.


  바울은 그리스 지역에서 석달을 머물고 배를 타고서 시리아로 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음모가 있어서 항로가 아닌 육로를 택합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바울이 배를 탈 것으로 예상하고, 그를 습격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다시 왔던대로 길로 돌아서 예전에 디도를 기다렸던 드로아 지방에 다시 도착합니다.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 사람 가이오와 디모데, 그리고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가 이번 여행에 함께 했다. 그들은 앞서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렸고, 우리는 무교절이 지난 뒤에 빌립보에서 배를 탔고 닫새 후에 드로아에서 그들을 만났다. 우리는 그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가 있습니다. 이들이 먼저 드로아에 도착해서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고, 바울은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서 드로아로 마침내 들어왔습니다. 이 친구들의 명단을 보면서 충격을 받습니다. 마치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는 듯 합니다. 출신지역이 전혀 다른 청년들이, 메시아 예수의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유대에서 시작된 복음은 온 땅으로 퍼져나갔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바울의 편지대로,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신실함 하나로 하나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모인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다른 서신서들을 통해 단서들을 모아보면, 이들은 모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각자 자신의 공동체에서 헌금을 가져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인, 가난하고 위기의 연속인 '그 교회'를 돕고자 함입니다. 그 교회가 이방 교회들에게 복음을 전달해주었다면, 이제 이방 교회들은 그들을 위해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15:26~28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낼 구제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신령한 복을 나누어 받았으니, 육신의 생활에 필요한 것으로 그들에게 봉사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마치고, 그들에게 이 열매를 확실하게 전해 준 뒤에, 여러분에게 들렀다가 스페인으로 가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6:1,2

성도들을 도우려고 모으는 헌금에 대하여 말합니다. 내가 갈라디아 여러 교회에 지시한 것과 같이, 여러분도 그대로 하십시오.

매주 첫날에, 여러분은 저마다 수입에 따라 얼마씩을 따로 저축해 두십시오. 그래서 내가 갈 때에, 그제야 헌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 주 첫날에 우리는 빵을 떼기 위해 모였다. 바울은 다음 날 아침 떠날 작정이었다. 그는 그들과 토론을 했는데 한밤줄까지 계속 말했다. 우리가 모여 있던 다락방에는 등불 몇 개가 타고 있었다. 유두고라고 하는 청년이 창가에 앉아 있었는데 바울이 말을 계속하자 졸음이 몹시 쏟아졌다. 그는 순간 잠에 빠져 3층 창밖으로 떨어졌는데,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


  이 하나님의 우주 가족은 함께 예수님의 살점을 떼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리고 밤이 새도록 복음과 공동체와 온세계에 대한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전기가 없을테니, 등불 몇 개가 어른거리는 어둑어둑한 방안에서, 음영이 짙게 드리워진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화를 이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유두고라는 청년이 밤늦은 시간 길어지는 바울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고 밀려오는 잠에 잠깐 눈을 감았을 때, 중심을 잃고서 3층 창밖으로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고 누가는 기록합니다. 


  이 내용은 우스개소리로 설교시간에 졸아서는 안된다고 말할 때 언급되기도 합니다만, 그 이상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날이 그 주의 첫날이요, 주일은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었고, 그들은 빵을 떼며 메시아 예수의 살점을 먹었을 때, 그들이 소망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부활이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이 새 가족 안에서, 한 청년의 예기치 못한 죽음과 다시 살아남은 단순히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는 태도를 비판하기 위함이 아닐 것입니다.


  바울이 내려가서 몸을 숙여 그를 일으키면서 말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의 호흡이 그 안에 있으니 말입니다."

  그는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서 빵을 떼어 그들과 함께 먹고는 새벽까지 계속 이야기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떠났다. 그들은 살아난 청년을 데려갔고 크게 위로를 받았다.


  부활의 실재.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시는 생명력. 그가 기절한 것인지 죽은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리한 번역일지 모르겠지만, 바울이 이때 한 말은 "그의 호흡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입니다. 바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말을 한 것인지, 우리는 추측해볼 뿐입니다만, 여기서 "그의 호흡"이 단순히 유두고가 작게 나마 숨을 쉬고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예수의 호흡 곧 성령이 유두고 안에 있어, 그 성령의 능력으로 이 위기를 전복시킨 것인지 아니면 양 쪽 다인지 생각해봅시다. 주어진 단서에서 확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어찌되었든 위기는 극복되었고, 하나님의 가족이 빵을 떼고 함께 대화하는 일은 계속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까지도 말입니다. 다시 살아남의 소망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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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9:23~41
그 무렵 그 돈 때문에 큰 소란이 일어났다. 은으로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만드는 데메드리오라는 은세공인이 있었는데, 그의 일꾼들은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 그가 일꾼들과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다 불러 모으고 말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우리가 그래도 잘 사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하는 이 일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바울이라는 사람이 에베소만이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역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삶의 방식을 바꾸라고 설득하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보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떳떳한 우리 사업에 불명예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위대한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전을 무시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아르테미스는 위엄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아시아 전체가, 아니 온 세상이 그 여신을 숭배하지 않습니까!"

  일이 벌어졌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그 일은 돈과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봤었던 내용이 기억날 것입니다. 바울의 선언한 복음과 그 복음이 가져온 하나님의 능력이 에베소 지역의 무수한 마술사들의 허위를 폭로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30억 상당의 마술 서적을 불태웠습니다. 이런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을 때, 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른 류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장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며, 이 새로운 조류를 막아서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거니시던 예루살렘에도 있었고,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에베소에도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 대한민국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으로 인해 에베소에서 마술이 더이상 돈벌이가 되지 않는 모습을 목격한 더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은으로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겼습니다.




  여러개의 젖가슴을 달고 있는 풍요로움의 상징인 이 아르테미스 여신은 에베소의 수호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이 아르테미스 신앙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바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아르테미스는 그저 사람이 만든 우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 동안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만들어 부를 축적하던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메드리오는 자신의 생존권을 주장한 것이고, 더메드리오와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제 노조를 결성하여 단체 행동을 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외쳤다.
  "에베소의 아데미는 위대하다! 에베소의 아데미는 위대하다!"
  온 도시가 소동에 휩싸였고, 모든 사람이 서둘러 극장으로 몰려들어서 바울의 동행인 마케도니아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끌고 갔다. 바울은 들어가서 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추종자들이 못하게 했다. 바울에게 호의적이었던 그 지방의 치안관 몇 사람도 극장 안에 들어가는 위험을 무릅쓰지 말라고 충고하는 전갈을 보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외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외쳤다. 사실 그 집회 전체가 완전히 혼란에 빠졌고, 대다수 사람들은 애초에 자신이 왜 그곳에 왔는지도 알지 못했다. 유대인들이 알렉산더를 앞으로 밀었고, 무리 중 몇 사람이 그에게 자초지종을 알렸다. 그는 조용히 해 달라고 손짓을 하고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다함께 약 두 시간 동안 외쳤다.
  "에베소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

  은 세공업자들로부터 시작된 이 미움과 분노는 도시 전체를 집어 삼켰습니다. 이상하게도 나쁜 건 전염이 잘만 됩니다. 아, 이상하다는 말은 취소합니다. 사람의 좋지 않은 것에 잘 달라붙는 경향을 가리켜 타락이라 부릅니다. 악은 사람을 숙주로 삼아 자신의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이 곳 에베소에서 말입니다. 아르테미스는 에베소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것이 정작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르테미스는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를 보여줄 뿐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정작 바울은 찾지 못했고, 바울과 함께 다니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꿩대신 닭이라고 에베소의 야외 극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에베소의 야외 극장에는 약 2만 5천명 정도를 수용한다고 하니, 2만 5천명에게 둘러싼 이 두 사람의 공포를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2만 5천명의 성난 군중 소리치는 "에베소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 귀가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는 이 두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당장 야외 극장으로 달려가, 이 2만 5천명에게 연설을 하고자 합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러한 폭동이 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2만 5천명에게 한 번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을 잘 알고 있는 그의 친구들이 말립니다.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바울은 가난한 사람들만 사귀지 않았습니다. 에베소 지역의 공무원들 중에도 친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울의 성격을 뻔히 아는 그들은 바울에게 절대 극장으로 들어가선 안된다고 급히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소요가 더욱더 가열차지는 가운데, 누가는 그것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외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외쳤다. 사실 그 집회 전체가 완전히 혼란에 빠졌고, 대다수 사람들은 애초에 자신이 왜 그곳에 왔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 사람들은 애시당초 목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일행에 대한 원망과 살의로 가득차 있었다기 보다는 권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분전환으로 이 군중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뭔 일 났데?" 하면서 군중에 끼어서, "에베소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는 구호에 자신의 목소리를 그저 뜻없이 더했을 것입니다. 정말 말 그대로 '군중심리'입니다.


  이 와중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똑똑하고 재리에 밝으며,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려는 폐쇄성을 고집하는 유대인들은 어느 민족에게나 미움을 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디로 튈줄 모르는 군중들이 혹여나 미운털이 박혀있는 자신들에게 화살을 돌리지 않을까 걱정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라는 유대인을 내세워 자신들의 무고함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유대인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 사람들은 무언가 이유나, 논리나, 뜻을 알고 싶어서 모인게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기분전환 중입니다. 이렇게 외치면서 말입니다. "에베소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그 시의 서기관이 무리를 조용히 시키고 말했다. "에베소 사람들이여, 우리 도시 에베소가 위대한 아르테미스의 고향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그 신상이 있는 영예로운 곳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진정하고 무모한 일을 삼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들을 여기에 데려왔는데, 그들은 신전에서 도둑질을 하지도 않았고 우리 여신을 모독하지도 않았습니다.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료들이 누구를 고소할 일이 있으면, 법정은 열려 있고 치안관들도 있으니, 그들이 서로 소송을 하게 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그 이상을 알고자 한다면, 공인된 집회에서 처리해야 합니다. 오늘 이 폭동 때문에 우리 자신도 법적 절차를 거칠 위험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 소동을 충분히 설명할 만한 어떠한 이유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이렇게 말하고 집회를 해산시켰다.

  서기관이 등장합니다. 그는 고린도 법정의 갈리오처럼, 바울을 돕는 연설을 합니다. 바울과 어떠한 관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의 연설 내용은 이러합니다. 일단 아르테미스를 치켜세워줍니다. 본문에 "하늘에서 내려온 그 신상" 이라는 말은, 아마도 최초의 아르테미스 여신상은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르테미스를 치켜세워준 서기관은 바울을 옹호합니다. 그가 도둑질을 하거나 아르테미스를 직접적으로 모독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문제를 해결하는 합리적인 절차를 말합니다. 로마의 절차란 총독에게 이 일을 알려서 재판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경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같은 절차를 거쳐 예수를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총독들이 가장 꺼려하는 것이 바로 폭동입니다. 신인 황제가 다스리는 로마는 조용해야 합니다. 폭동이 일어났을 때 가장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사람이 총독입니다. 그래서 총독은 어떻게든 민중들의 폭동만큼은 막아보려 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가 무죄임을 알면서도 군중들의 결정에 참견하지 않기로 한 것은,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명분도 없는 폭동을 일으켜 총독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더 나아가 로마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돌아오는 것은 십자가형뿐입니다. 사람들은 이 일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제 정신을 차리고서 뜻없이 모였던 그 자리에서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에베소의 사람들이 아르테미스에 열광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오늘날의 아르테미스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그 앞에서 어떤 태도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밤입니다. 아리송한 질문들 속에 분명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사람은 잘못된 정체성이라도 그것을 붙잡고 고집부릴 수 있고, 심지어 그 고집은 집단적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정체성은 이익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 앞에서 바울은 결코 굴하지 않았다는 사실 속에서, 그의 정체성을 더욱 알고 싶어 집니다. 닮고 싶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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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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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9:11~22
  하나님이 바울의 손을 통해 비상한 능력을 행하셨다.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 닿았던 손수건이나 수건을 병든 사람들에게 얹고는 했는데 그러면 병이 낫고 악한 귀신이 떠났다.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등장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손을 통해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바울의 몸이 닿았던 물건들에 조차도 '능력'이 있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에베소라는 도시는 온갖 마술과 주술이 성행하던 곳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미에 마술 관련된 책을 불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 태운 마술관련 서적의 값이 노동자 5만명의 일당에 달하는 금액이라니(6만원이라고 계산하면, 30억 정도입니다.), 이 도시가 얼마나 '능력'과 관계된 일에 심취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도시에서 하나님은 참말로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메시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마치 이집트에서 출애굽할적에 사람들이 숭배하는 우상의 허위를 폭로하고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에베소 사람들의 우상들을, 말씀의 능력 아래 꿇리십니다. 그 능력 앞에 죽음의 영향력(병)은 소멸되고, 왜곡된 인격(귀신)은 치유됩니다.

  바울이 이곳 에베소에서 썼던 편지로는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를 들 수 있는데, 그 편지들에서 왜 '능력'이라는 단어가 자주 반복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악한 귀신에 들린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귀신을 쫓아내려 시도하며 떠돌아다니던 유대인들이 있었다.
 "바울이 선포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네게 명한다!" 라고 그들은 말했다.
  이런 일을 하던 사람들 중에 유대인 대제사장 스게와 일곱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한번은 악한 귀신이 그들에게 물었다.
  "내가 예수를 알고 바울도 잘 아는데, 당신들은 누구요?"
  악한 귀신에 들린 남자가 그들을 덮쳤는데, 그 힘이 강하여 그들 모두를 제압해서, 그들은 벌거벗은 채 상한 몸으로 그 집에서 달아났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모두가 이 일을 알게 되었다. 그들 모두가 두려워했고, 주 예수의 이름을 찬양했다.

  에베소는 작은 도시가 아닙니다. 당시 마술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지중해 연안 도시들 중 손에 꼽을 만한 큰 도시였습니다. 그런 도시에서 바울이 워낙 유명해지니까, 바울을 사칭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누가는 '스게' 라는 이름의 유대인 대제사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이 '대제사장'이라는 직책도 사기일 확률이 놓습니다. 유대인들의 대제사장 목록에 '스게'라는 이름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사기꾼 스게와 그의 일곱 아들들은 바울이 선포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왜곡된 인격을 제압하려 애썼습니다.

  몇 번은 잘 되는듯 싶더니 한 번은, 악한 귀신이 "당신들은 누구?"라고 물었습니다. 이 귀신의 질문이 참으로 정곡을 찌릅니다. 예수를 믿지도 않으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려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말 그대로 '근본없는 사람들'입니다. 귀신은 이 근본 없는 이들을 역으로 제압해버립니다. 여기서 누가는 재치있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카라.퀴리오'라는 단어인데(본문에는 "힘이 강하여 그들 모두를 제압해서"라 되어 있습니다), '카타'는 '아래로'라는 뜻이고, '퀴리오'는 '주님'할 때 그 '주'입니다. 즉 귀신이 그들을 '아래로 짓눌러 주인 노릇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비참한 지경에 이른 스게 일당들은 홀딱 벗겨진 몸으로 달아났습니다. 에베소에 이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스게 일당의 소문이 알려지자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미 예수를 믿던 많은 사람이 공개적인 고백을 하러 나와서 자신들이 그때까지 했던 일을 밝혔다. 마술을 하던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책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불태웠는데, 누가 그 값어치를 계산해 보니 은돈 5만 닢에 달했다. 그렇게 말씀은 주의 능력을 따라 자라났고 강했다.

  이미 예수를 믿던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죄를 밝혔습니다. 마술을 믿고 있던 이들은 마술관련 서적들을 가져와 모두 불태웠습니다. 금액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30억쯤. 당시로 은돈 5만닢. 그렇게 말씀은 주의 능력을 따라 자라났고 강했습니다. '왜곡된 인격'이 자신의 능력을 기세등등하게 떨치며,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비인간적인 행위와 뜻모를 주문에 집착하게 만들었던 그 에베소에서, 하나님이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말씀과 능력을 통해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바울은 다시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까지 가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정하고 말헀다.
  "그곳에 들렀다가 반드시 로마에도 가 보아야겠습니다."
  그는 자신을 돕는 사람들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먼저 마케도니아로 보내고, 자신은 아시아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놀라운 일들이 벌인 당사자인 바울은, 에베소에 눌러 앉기는 커녕 이제 떠날 채비를 합니다. 본문의 저 "마음속으로"라는 말에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원어로는 "영으로 결정했다"고 되어있는데, 혹자는 그 영이 성령을 가리킨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혹자는 바울 자신을 가리킨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영'은 오늘날로 하면 '인격'이고, 바울이 하나님의 인격과 늘 교제하며 고민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바울의 결정은 분명 하나님의 뜻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무리없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저 바울의 생각을 따라 사도행전의 남은 내용들이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21~28의 주제는 바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입니다. 이 여정은 누구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 분도 갈릴리 촌구석에서 시작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셨고, 그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지배자들에게 붙잡혀 로마 총독 앞으로 압송 되셨습니다. 바울의 마지막도, 이 사람과 판박이입니다. (바울이 '어떤 상태로' 로마에 가게 되는지 알게 되면, 더욱 더 그 비슷한 결말에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바울은 일단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먼저 마케도니아로 보냅니다. 자신은 에베소에 좀 더 시간을 보냅니다. 바울도 이들과 함께 마케도니아로 일찍 떠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시간을 조금 더 보내기도 했을 때, 에베소에서는 큰 폭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내일 살펴볼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 폭동 앞에선 바울에게, 분명히 할 말과 할 일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에베소에 조금 더 오래 남아있게 하셨다는 생각도 듭니다. 놀라운 것은, 바울이 "마음속으로 결정"한 것들을 따라 하나님의 역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무엇을 결정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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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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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제 19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동안 아볼로라는 인물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에베소에 남겨놓은채 '그 교회'로 올라갔습니다. 그 동안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 '성령'에 대해서 배웠고, 그 성령의 교제에 참여하기 위해, 이제 회당을 떠나 고린도에 있는 공동체에 들어가,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제 누가는 카메라를 돌려 다시금 에베소로 돌아온 바울에 주목합니다. 

사도행전 19:1~10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 바울은 내륙 지방을 거쳐 에베소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제자들 몇 사람을 만나서 그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믿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바울이 물었다.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대답했다.

  아마도 요한의 세례 운동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었던 요단강가와 에베소는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곳 에베소에도 요한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요한의 세례는 받았으나, 성령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습니다. 마치 메시아 예수에 대해서 논증했으나, 성령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아볼로처럼 말입니다.

  성경에 '제자'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만, 이 '제자'를 '온전한 사람'이라 읽어선 곤란합니다. 성경은 누군가를 스승으로 둔 사람을 가리켜 다 '제자'라 부릅니다. 심지어 성령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제자는 제자입니다. 그러니 이 단어에 너무 무게감을 실어선 안되겠습니다. 당신은 제자입니까? 사람은 태어나서 무언가를 배우며 살아가니 모두가 제자입니다. 제자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작 중요한 질문은 '제자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누구의 제자입니까?' 입니다.  메시아 예수의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했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뒤에 오실 분에 대해 말했고, 그 사람이 백성들이 믿어야 하는 분, 바로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를 믿는 것이, 성령을 받는 것과 밀접한 상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14장을 인용합니다.

요한복음 14:16~21
내(예수님)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곁에서 돕는 이'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숨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승천 이후,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임을 '알고', 또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이 일의 중심에 성령이 계십니다.
 
  요한은 새로운 출애굽을 예고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고한대로 모든 사람을 죄로부터 출애굽하시는 '인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예전에 모세와 같이 거짓왕을 파멸시키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유의 여정을 떠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의 여정은 광야의 여정이었고, 구름 기둥을 따르는 여행길이었습니다. 예수가 출애굽의 시작이라면, 성령은 '예수를 통해 시작된 사람들'을 인도하는 구름기둥입니다. 이집트에서 출애굽한 사람들은 생각없이 앞에 보이는 구름기둥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지만, 이 새로운 구름기둥은 사람의 마음 한 가운데로 들어와,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며 하나님의 길을 따라 나아갑니다. 하나님 임재의 구름을 가슴에 담은 성전들이, 그렇게 현시대의 광야길을 헤쳐나갑니다.

  예수는 출애굽의 시작이요, 성령은 광야의 인도자라 하겠습니다.예수를 믿었는데 성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언약백성 신분에 걸맞지 않은 일입니다. 속에 계신 성령을 슬프게 하는 가슴 아픈 경우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러고나서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은 방언을 하고 예언을 했다. 그들은 모두 열두 명쯤 되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40일 뒤,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일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열 두 명의 요한의 제자들은, 이제 성령을 받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129명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방언을 하고 예언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렇게 성령을 받는 경우를 여러 차례 묘사했습니다. 먼저는 앞에서 언급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졌고, 8장에 가면 베드로와 요한에게 안수를 받은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성령 안에서 일하고 있는 바울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10,11장에서는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이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을 받는 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소용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기준, 믿음 뿐입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습니다.

  바울은 회당으로 들어가서, 석 달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 논증하고 설득하며 담대히 말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이 마음이 완고해져서 믿지 않으며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도'에 대해 근거 없는 못된 주장을 하자 바울은 그들을 떠났다.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두란노 학당에서 날마다 논증했다. 그는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아시아의 모든 거주민이 주의 말씀을 듣도록 이 일을 2년 동안 했다.

  이 믿음 하나만으로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이야기가 유대인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통해 메시아와 성령을 새롭게 이해한 바울의 말들'은, 유대인 회당에서 담대하게 말해야 하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서 말해야 하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자신의 목숨조차도 하나님의 드러남과, 유대인들에 대한 긍휼을 더 귀히 여길 때 할 수 있는 말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논증하고 설득합니다. 누가는 "몇몇 사람이 완고해져서"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단순히 바울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로마서 9-11장의 안경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보여주는 '완고함'이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방법이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서잉 출애굽하기 위해서 파라오가 '완고해진 것 같이', 하나님은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완고함을 통해서도 그 분의 뜻을 이뤄가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에베소 회당의 완고한 자들 때문에, 에베소에서 생겨난 제자들이 두란노에서 2년에 걸쳐 집중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완고함 자체가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완고함으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은, 자신이 파라오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요, 그 끝은 멸망일 뿐입니다. 완고함으로 사용되는 진노의 그릇이 아니라, 긍휼함을 전하는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체류한 이 2년동안 고린도전서를 썼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타이밍을 재다가 고린도전서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아, 그 전에 에베소에서 있었던 큰 사건을 빼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에베소에서 있었던 큰 사건'을 살펴본 뒤, 이제 고린도전서를 본격적으로 탐독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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