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9:11~22
  하나님이 바울의 손을 통해 비상한 능력을 행하셨다.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 닿았던 손수건이나 수건을 병든 사람들에게 얹고는 했는데 그러면 병이 낫고 악한 귀신이 떠났다.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등장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손을 통해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바울의 몸이 닿았던 물건들에 조차도 '능력'이 있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에베소라는 도시는 온갖 마술과 주술이 성행하던 곳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미에 마술 관련된 책을 불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 태운 마술관련 서적의 값이 노동자 5만명의 일당에 달하는 금액이라니(6만원이라고 계산하면, 30억 정도입니다.), 이 도시가 얼마나 '능력'과 관계된 일에 심취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도시에서 하나님은 참말로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메시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마치 이집트에서 출애굽할적에 사람들이 숭배하는 우상의 허위를 폭로하고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에베소 사람들의 우상들을, 말씀의 능력 아래 꿇리십니다. 그 능력 앞에 죽음의 영향력(병)은 소멸되고, 왜곡된 인격(귀신)은 치유됩니다.

  바울이 이곳 에베소에서 썼던 편지로는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를 들 수 있는데, 그 편지들에서 왜 '능력'이라는 단어가 자주 반복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악한 귀신에 들린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귀신을 쫓아내려 시도하며 떠돌아다니던 유대인들이 있었다.
 "바울이 선포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네게 명한다!" 라고 그들은 말했다.
  이런 일을 하던 사람들 중에 유대인 대제사장 스게와 일곱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한번은 악한 귀신이 그들에게 물었다.
  "내가 예수를 알고 바울도 잘 아는데, 당신들은 누구요?"
  악한 귀신에 들린 남자가 그들을 덮쳤는데, 그 힘이 강하여 그들 모두를 제압해서, 그들은 벌거벗은 채 상한 몸으로 그 집에서 달아났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모두가 이 일을 알게 되었다. 그들 모두가 두려워했고, 주 예수의 이름을 찬양했다.

  에베소는 작은 도시가 아닙니다. 당시 마술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지중해 연안 도시들 중 손에 꼽을 만한 큰 도시였습니다. 그런 도시에서 바울이 워낙 유명해지니까, 바울을 사칭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누가는 '스게' 라는 이름의 유대인 대제사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이 '대제사장'이라는 직책도 사기일 확률이 놓습니다. 유대인들의 대제사장 목록에 '스게'라는 이름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사기꾼 스게와 그의 일곱 아들들은 바울이 선포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왜곡된 인격을 제압하려 애썼습니다.

  몇 번은 잘 되는듯 싶더니 한 번은, 악한 귀신이 "당신들은 누구?"라고 물었습니다. 이 귀신의 질문이 참으로 정곡을 찌릅니다. 예수를 믿지도 않으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려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말 그대로 '근본없는 사람들'입니다. 귀신은 이 근본 없는 이들을 역으로 제압해버립니다. 여기서 누가는 재치있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카라.퀴리오'라는 단어인데(본문에는 "힘이 강하여 그들 모두를 제압해서"라 되어 있습니다), '카타'는 '아래로'라는 뜻이고, '퀴리오'는 '주님'할 때 그 '주'입니다. 즉 귀신이 그들을 '아래로 짓눌러 주인 노릇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비참한 지경에 이른 스게 일당들은 홀딱 벗겨진 몸으로 달아났습니다. 에베소에 이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스게 일당의 소문이 알려지자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미 예수를 믿던 많은 사람이 공개적인 고백을 하러 나와서 자신들이 그때까지 했던 일을 밝혔다. 마술을 하던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책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불태웠는데, 누가 그 값어치를 계산해 보니 은돈 5만 닢에 달했다. 그렇게 말씀은 주의 능력을 따라 자라났고 강했다.

  이미 예수를 믿던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죄를 밝혔습니다. 마술을 믿고 있던 이들은 마술관련 서적들을 가져와 모두 불태웠습니다. 금액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30억쯤. 당시로 은돈 5만닢. 그렇게 말씀은 주의 능력을 따라 자라났고 강했습니다. '왜곡된 인격'이 자신의 능력을 기세등등하게 떨치며,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비인간적인 행위와 뜻모를 주문에 집착하게 만들었던 그 에베소에서, 하나님이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말씀과 능력을 통해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바울은 다시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까지 가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정하고 말헀다.
  "그곳에 들렀다가 반드시 로마에도 가 보아야겠습니다."
  그는 자신을 돕는 사람들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먼저 마케도니아로 보내고, 자신은 아시아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놀라운 일들이 벌인 당사자인 바울은, 에베소에 눌러 앉기는 커녕 이제 떠날 채비를 합니다. 본문의 저 "마음속으로"라는 말에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원어로는 "영으로 결정했다"고 되어있는데, 혹자는 그 영이 성령을 가리킨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혹자는 바울 자신을 가리킨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영'은 오늘날로 하면 '인격'이고, 바울이 하나님의 인격과 늘 교제하며 고민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바울의 결정은 분명 하나님의 뜻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무리없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저 바울의 생각을 따라 사도행전의 남은 내용들이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21~28의 주제는 바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입니다. 이 여정은 누구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 분도 갈릴리 촌구석에서 시작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셨고, 그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지배자들에게 붙잡혀 로마 총독 앞으로 압송 되셨습니다. 바울의 마지막도, 이 사람과 판박이입니다. (바울이 '어떤 상태로' 로마에 가게 되는지 알게 되면, 더욱 더 그 비슷한 결말에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바울은 일단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먼저 마케도니아로 보냅니다. 자신은 에베소에 좀 더 시간을 보냅니다. 바울도 이들과 함께 마케도니아로 일찍 떠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시간을 조금 더 보내기도 했을 때, 에베소에서는 큰 폭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내일 살펴볼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 폭동 앞에선 바울에게, 분명히 할 말과 할 일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에베소에 조금 더 오래 남아있게 하셨다는 생각도 듭니다. 놀라운 것은, 바울이 "마음속으로 결정"한 것들을 따라 하나님의 역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무엇을 결정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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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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