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띠, 잘 지냈니? 지난 번 '과거의 소망'에 이어 '확인되었다'를 쓰려다가, 저 둘 사이에 꼭 들어가야 할 내용이 생겼어. 과거의 소망이 확인되기 위해서는, 저 둘이 서있는 지평, 즉 이스라엘 서사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야 해. 그런데 '이스라엘 서사'라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벌써 돌부리에 걸린 시대적 속박의 느낌이 있다. '포스트모던의 시절에 서사를 논하다니?!'



1. 가라앉는 거대서사


  우리가 사는 시절을 흔히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른다. 물론 저잣거리 씨알들과는 무관한, 학자들의 용어긴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부르는데는 이유가 있어. 

  모던(근대)과 포스트모던의 경계를 어찌 나눌 수 있을까? 여러 가지 특징이 있겠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중에 하나는 인류를 하나로 묶는 거대서사를 믿느냐, 믿지않느냐가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겠다. 인류는 더이상 삶 전체를 아우르는 큰 이야기를 믿지 않아. 사람들 사이에서 <성경>의 권위가 약해진 것도 이 때문인듯. <성경>은 인류와 우주 그리고 하나님이 등장하는 정말로 거대한 서사를 말하는 책인데, 거대서사에 대한 불신이 시대사조인 요즘의 성경은 그저 판타지, 아니면 민족설화 정도로 읽히고 있어. 


  근대가 무너진 이유는 무엇보다도 양차대전을 얘기할 수 있다. 게르만족이 역사의 정점에서 새로운 지배 계급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거대서사가 인류를 무척이나 괴롭게 했잖아. 신학자들은 히틀러를 지지했고, 철학자들은 역사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실존'에 몰두하기 시작했어. 거대서사는 '신화'라는 이름으로 평가절하되고 역사로 취급을 받지 못했지. 이러한 시대 속에서 성경이 어떠한 취급을 받았을까 생각해봐. 거대서사의 배는 양차대전의 암초 앞에서 침몰하고 있고, 성경은 그 안에 승객처럼 여겨졌어.


  그러나 지금 바다로 가라앉고 있는 저 배의 이름은 사실 거대서사가 아니야. 분명한 이름이 있어. 바로 계몽주의의 서사야. '계몽'이라는 말을 생각해봐. 무지한 사람들을 깨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넘치던 시기가 있었어. 다들 인류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희망에 들떠있었어. 그리고 이 계몽주의의 연장선에 '근대'가 있고. '인류의 발전'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열심히 애쓰던 그 이야기가 무너진거야.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18세기를 역사의 절정으로 봤으나, 그 결과는 전쟁이었고, 인류에게 희망을 줄 것이라는 과학은 원자폭탄을 안겨줬지. 그래서 계몽주의 프로젝트는 처절한 실망감만을 남겨줬어. 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인간성을 지탱하고 있던 희망의 기류들이 모두 신기루처럼 사라졌어. 더이상 인간이 계몽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되어버렸어. 그리고 18세기를 절정으로 가지고 있던, 인류 발전 프로젝트라는 계몽주의의 거대서사는 그 시절부터 불신의 대상이 되어버렸어. 그래서 포스트 모던이야. 


  이것을 대한민국 사회의 386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비추어 생각해보는 것은 비약일까? 우리나라의 급속한 경제발전을 경험했던 우리의 아버지들은, '우리는 그 시절 열심히 살았지'라고 말하잖아. 정말 그들에게는 정말 '우리가 노력하면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어. 마치 18세기의 유럽 사람들처럼 말이야. 그 발전은 경제발전, 부강한 나라, 잘먹고 잘 사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 꿈을 이루는 듯 했어. 그러나 발전은 지속될 수 없었고, 결국 386세대들의 서사는 실패야. 그럼에도 과거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그 시절을 추억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 실패한 서사를 붙잡고서 다음 세대에게 말한다. "너희들은 희망도 열정이 없다고" 그러나 다음 세대는 더이상 386세대들과 같은 희망을 노래할 수 없어. 그래서 이 사회가, 꺽인 희망을 노래했던 자들과, 그 희망을 거부하는 자들로 이 사회는 양분된다.


  계몽주의의 서사가 망조라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아직도 '진보의 신화'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경제 발전의 신화도 마찬가지의 궤적을 가지고 있고. 경제가 발전해서, 우리의 삶이 나아지기를 기대하면서도, 더불어 계속 이 발전이 언제 멈추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지. 아직도 경제 발전의 진보 신화를 믿고 있다면, 더글라스 스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라는 책을 읽어보길 바라. 경제발전의 신화 역시 망할 것이 분명한 서사야. 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는데, 이 서사를 개인의 이야기로 치환해서 생각해봐. '내 인생이 이대로 점점 나아질 거야'라는 헛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장담하는데 점점 나아지지 않을거야. 죽음과 가까워지겠지. 끝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거대서사든, 개인사든, 별로 권장할만한 것은 아니야.


2. <성경>은 그 배에 없어


  그런데 문제는, 계몽주의의 '인류 발전 프로젝트'에 대한 불신이, 모든 류의 거대서사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성경>도 계몽주의와 같은 선상에서 불신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거야. 계몽주의 서사가 망조라는 사실을 나도 인정해. 인류가 진보를 거듭하다가, 진정한 희망을 발견하는 일은 결코 없을거야. 이 계몽주의발 '진보의 신화'는 마치 바다에 빠져가는 타이타닉과 같아. 인간 스스로 계몽할 수 있고, 인류와 세계가 발전을 거듭해서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은 폐기 처분 해야 해. 그럼 폐기해버리고, 우리는 전체를 아우르는 그 어떠한 희망 없이, 이야기 없이, 모두가 개체로서 그저 살면 되는 걸까? 모든 것을 해체하자는 포스트모던은 그 자체로 해답인 걸까?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타이타닉 속에서 케이트 윈슬렛을 건져내야 하는 디카프리오가 되고자 해. 우리가 건져내야 할 진정한 거대 서사가 있어.




 

  그런데 기독교인들의 위치선정이 이상해. 계몽주의의 근거없는 희망을 믿는 자들과, 그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로 세계는 양분되었는데, 오늘날 교회의 스탠스는 전자 쪽으로 기운 것 같아. 그러나 계몽주의발 진보의 신화는 망하는 이야기고, 성경과는 전혀 다른 서사야. 인간이 계몽할 수 있고, 세계가 나아질 것이라는 근거없는 희망은, 기독인이 몸담고 있어야 할 배가 아니라는 말이야. 성경은 그 배 안에 없어! 


  그럼 계몽주의 신화와 성경이 어찌 다른지 생각해보자. 일단 <성경>은 과학발전의 18세기를 역사의 절정이라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인간 스스로 계몽할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아. 이 두 가지. 역사의 절정에 대한 다른 이해와, 인간의 능력에 대한 상이한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해. 


  성경이 말하는 역사의 절정이란, 과학 발전의 18세기가 아니라, 먼지 날리는 A.D. 1세기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야. 이 말에 '그럴 줄 알았지'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왜냐하면 이 사건들이 역사의 절정이라는 얘기는, 그 앞에 역사의 발단, 역사의 전개가 있다는 말이고, 이러한 서사의 틀 안에서만이 역사의 절정이 바르게 해석된다는 말이기 때문이야. 즉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성경이 가진 거대 서사안에서 제 의미가 드러나. 십자가와 부활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어. 왜냐하면 그 십자가와 부활을 절정으로 갖는 '그 이야기'를 가지고 십자가와 부활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야. 창조로 시작해서, 부활로 절정을 이루는, 이 거대 서사의 맥락 없이, 파편적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알았다고 오해했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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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글 힘들어하는 에띠,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달을 기대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들을 고민 중이야. 나는 너에게 뭘 해줄 수 있을지 항상 생각해.  

 



WRITTEN BY
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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