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띠! 나야. 나는 지금 병원에 있어. 너도 알다시피, 지금 우리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 

  어머니가 아프신 동안 나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어.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으면, 시간이 흐를 것이고, 시간이 흐르고나면 이 고통이 지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런데 생각을 안하려는 내 생각은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어. 나는 더욱 생각에 골몰하게 되었고, 이 비현실 속에서 더욱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더라. 나에게 왜 이러한 일이 생긴 것일까?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혹은 연인과 팔짱을 끼고 웃으며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봐. 그리고 그들과 다른 나를 봐. 적어도 내 인생에서만큼은 내가 주인공이기에 내가 생각하는 우주의 중심에는 내가 있어. 그러나 그 주인공은 비극의 주인공이야. 주인공은 도대체 나에게 이 비극이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 비극은 어떤 결말을 낳을 것인지, 계속 시나리오를 쓰도록 강요받고 있어. 때로는 이 시나리오의 부정적 결말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때로는 작은 단서를 붙잡아 반전을 꿈꾸는 일상의 반복이야. 이러는 과정 속에서 나는 그간 내가 붙잡고 있던 신념들을 다시 되돌아보며, 도대체 내가 어찌 생각하는 것이, '바르게' 생각하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되물을 수 밖에 없었어.


  잘 됐지. 나는 너에게 신(神)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 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 이전에 써놓았던 글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어. 나는 내가 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모르고 있던 것에 대해서 많은 말을 써놓았더라. 정작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없는 말들이면서, 마치 그 속에 무언가 있는 것마냥 잔뜩 허세를 부리고 있더라. 거짓과 허위가 갈 곳은 쓰레기통이 적절하지. 삶의 고뇌와 어려움은 생각을 걸러내는 정수기 필터와도 같아. 나는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은 카톨릭계 병원이야. 중환자실 대기실 옆에는 기도실이 있고, 그 기도실에는 카톨릭 공역 성경이 있어.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이 우주의 공허한 울림 속에, 나는 그 글자들을 붙잡을 수 밖에 없었어. 그간 글자에 매이면 안된다고 그렇게 말하고 다녔던 내가, 하나되기 위해서는 글자를 넘어서야 한다고 그렇게 텍스트를 비판했었던 내가, 결국 불안 속에서 집어든 것은 글자였어. 물론 기도도 하려 했지만, 나는 이 위기 속에서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몰랐어. 무언가 글자가 필요헸어. 내 인격을 관통시켜, 내가 먹고 호흡해야 할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어.


  그래서 보게 된 것이 요한복음 11장과 야고보서야.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해. 이것으로 내가 지금 숨 쉬고 있음을 알려. 숨으로 글자를 붙잡으니, 글자를 이전과 달리 새로이 보게 되었음을 밝혀. 


1. 요한복음 11장


  작년이었지, 내가 맹장수술을 받은 것이. 그때 너도 병원에 왔었잖아. 전신마취를 하고 깨어나는데, 내 옆에는 어머니가 계셨어. 졸려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데, 어머니는 계속 나에게 잠들면 안된다면서 나를 깨우셨어.(그랬던 엄마를 지금은 내가 깨우고 있어) 그 때 정신 못차리는 와중에 내가 횡설수설 말했던 성경구절이 있어.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그 와중에도 영어로 저걸 읊고 있었다니 내 허세가 무의식까지 닿는구나. 뼛속부터 죄인이로다. 

  저 구절이 등장하는 맥락을 말해줄게. 예수의 친구였던 나사로라는 사람이 죽었어.(카톨릭 성경에는 '나자로'라 되어 있더라) 예수는 고의적으로 그가 죽고나서 나흘이 지난 뒤에야 그를 찾아왔어. 제자들은 나사로를 보러 가려는 예수를 말렸는데, 왜나하면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다 근처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러나 예수는 알 수 없는 대답을 하시고는 나사로에게 가셨어. 

  "낮에 다니면 빛이 있으므로 넘어지지 않고, 
  밤에 다니면 빛이 없으므로 넘어진다. 지금은 낮이야."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째.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로 가득한데, 예수는 지금이 낮이므로 넘어지지 않는다 했어. 우리는 흔히 나에게 편한 것이 빛이고, 나에게 불편한 것을 어둠이라 생각하지만, 예수는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현장에도 빛이 있으면 낮이요. 낮에는 넘어지지 않는다 했어. 에띠! 내가 이 글자들을 읽고 무슨 생각을 했겠어?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밤일까, 낮일까?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 내가 넘어진다면 밤이야. 내가 넘어지지 않는다면 낮이야. 빛이 있으면 낮이나, 내가 눈이 멀어버리면 아무 소용없어. 빛도 있어야 하고, 내 눈도 떠 있어야 해. 그럼 넘어지지 않아. 내가 매 순간 빛 아래 있음을 깨닫기를, 눈 뜨고 그 빛 아래 비춰진 것들을 선명히 볼 수 있기를.

  그렇게 나사로를 찾아온 예수께, 마르다는 말해.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좀 더 일찍 오셨더라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텐데요!"

  나는 요새 이와 같은 말을 너무 자주 듣고 있어. 우리 엄마가 몇 시간이라도 일찍 수술을 받았더라면. 우리 엄마의 증세를 하루라도 일찍 알아챘더라면. 병원에서 조금 만 더 서둘러줬더라면. 내가 조금 더 엄마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하루종일 '그랬더라면'을 읊고 있는 나를 봐. 나는 마르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오빠를 죽음으로 잃은 마르다도 나와 같은 심정인거야. 아마 하루종일 원인을 규명하고자 애쓰며 괴로워했을거야. '이랬다면', '저랬다면'. 그 무수한 탓들 중에 예수에 대한 탓도 있어. '예수께서 조금만 더 일찍 오셨더라면.'

  그러한 마르다에게 예수는 물으신다.

  "너는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느냐?"

  마르다가 대답하지. 

  "네, 마지막날 부활 때 오빠가 살아날 것을 믿지요."

  마르다의 대답은 시덥지 않은 대답이야. 전혀 희망과 기대를 걸지 않은채 말하는 대답이야.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 죽었던 유대인들이 다시 부활할 것을 믿고 있었으니까. 마지막 날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다시 부활한다는 소식은 분명 놀라운 소식이지만, 지금 아픔을 겪고 있는 가족들에게는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아. 나 역시 마찬가지야. 우리 엄마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부활하실 것이라 누군가 말해준다면, 나는 그 말에 아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로는 지금의 허탄한 마음을 채울 수 없어. 나는 지금을 원해. 지금 엄마와 서로 눈을 맞추고, 서로 대화하며, 그렇게 손을 붙잡고, 함께 꽃놀이 가는 지금을 원해. 그 지금과 멀리 떨어져 있는 저 미래의 부활이란 절망한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미래야. 마르다에게도 마찬가지 였을거야. 
그런데 저 마르다의 대답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삶이니,
  나를 믿는 이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이는 죽지 않을 것이다."

  예수는 시제를 바꾸었어. 시간을 뒤집었어. 부활할 것이라 말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인격화된 부활이라고 말했어. 예수는 역경을 이겨낸 삶 그 자체야. 곧 부활이야. 먼 머리에나 있었던 그 소망이, 예수를 통해서 마르다의 현재로 돌입한거야. 먼 미래에나 있을 '참 인간다움'의 소망이, 현실에 이뤄진 것이 예수고, 그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은 그 소망을 현재화하게 되는 거야. 이것이 복음이고, 구원이야! 말이 복잡하지만 사실 어렵지 않아. 꿈이 이루어 지는 거야.

  어제 병실에서 드라마를 보게 되었는데, 그 드라마에 나온 철없는 아버지가, 자신이 로또에 당첨된 줄 알고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하더라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인간답게 살겠습니다."  

  저 '인간답게'에 대한 생각들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저 말이 모든 사람의 소망을 보여준다고 생각해. 몸이 아픈 사람이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든, 생활고 때문에 어려운 사람이든, 인간관계 속에서 괴로워 하는 사람이든, 모두가 하나를 바라고 있어. '사람답게 사는 것'을. 그 사람답게 사는 것이 먼 미래에나 있을 일이고, 그 일을 위해서는 많은 돈과 노동과 내 편될 사람들이 필요하다 생각하지만,(그리고 이것들에 대한 소망을 이용해서 인간권력이 만들어지지만) 예수는 모든 것을 뒤집어, 소망이 이뤄지는 현실을 만들어. 지금 시작되는 인간다운 삶. 이러한 삶이 시작되는 것을 '믿음'이라 불러. 그리고 예수를 통해서 '지금' 인간다움이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은, 삶과 죽음의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왕을 그 자리로 모셔. 신약성서에 줄곧 등장하는 말이 이 지점에서 이해될 수 있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노부타를 프로듀스'군에게도 말했지만, 나는 사실 이전에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이고, 이것은 보이냐 보이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라 생각했지. 그래서 예수도 죽음을 잠이라 말씀하신 것이구나. 죽음은 그저 잠에 지나지 않구나. 별 것 아니구나. 삶과 죽음은 그저 생각하기 나름이구나. 어쩌면 이것은 만에 하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받을 충격을 어떻게든 완화시켜보려고 이레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그러니 괜찮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마치 속에서 뭔가 걸린듯이 내려가지 않았고, 계속 나를 불편하게 했어. 뭔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아니야. 틀렸어. 내 생각은 바르지 않았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위기에 있는 사람에게, 삶과 죽음은 다른 것이 아니니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말할 수 있겠어? 장자가 이렇게 했지. 자기 처가 죽었는데도 꽹과리를 치면서 노래 부를 수 있었지. 나 역시 장자가 되려 했으나, 글자들은 내 앞에 장자와 완전히 다른 태도를 가진 사람을 보여주었어. 


  예수는 울고 있었어! 아무렇지도 않게 나사로를 보내는 초연한 모습이 아니라, 예수는 울고 있었어!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그의 가족들을 포함해서 동네 사람 모두 울고 있었고, 예수는 그들과 같은 마음이었어! 그가 공감했던 마음이란 죽음에 대한 슬픔이야! 인간다움의 현현, 하나님의 아들이 눈물 흘린다면, 죽음은 정말 슬픈거야. 삶의 다른 이름이라면 이렇게 슬플 수 없어! 내가 속한 전통 위에서, 우리는 예수를 '사람으로 일어선 말씀'이라 고백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었으니, 그는 하나님의 인격화요, 역경을 이겨낸 삶의 전형이며, 다시 말해 '부활 사람'이야.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눈물을 흘리신다. 지금의 나처럼. 나는 너무 슬퍼. 가슴 한 구석이 콱 막힌 것 같고, 괴로워.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누가 이 마음을 알아주겠어? 그러나 그 자리에 울고 있는 한 사람이 있어. 나와 같은 마음으로 울고 있는 한 사람이 있어. 

  성경에 "소망없는 자처럼 슬퍼하지 말고"라는 구절이었어. 이 말만 들으면 소망이 있으면 슬퍼하지 말라는 말로 들리지만, 그렇지 않아. 소망이 있는 슬픔이 있고, 소망이 없는 슬픔이 있는거야. 그리고 소망이 있더라도, 그 슬픔은 아플 수 있어. 마르다를 봐. 그리고 나를 봐. 미래의 소망을 믿고 있으면서도, 현실에 닥친 이 고통에 대해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해. 그저 무릎꿇어 기도할 뿐이야.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셨던 하나님도, 이와 같은 슬픔이야. 죽음으로 찾아오는 인간의 절망. 무력함.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에 공명하는 그 쓰라림. 


  그러나 슬픔이 끝이 아니야. 이제 이 장면에서 역전이 벌어진다. 먼 미래라고 생각했었던 그 소망이 현실로 돌입하고, 조금 전에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야" 라고 말씀하셨던 그 말씀 그대로, 삶과 죽음의 헤아릴 수 없는 간극이 메워진다. 무덤을 향해 소리치는 그 외침으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죽은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살아남으로.

  이 글자들을 읽고서 나는 생각을 고쳐 먹었어. 살아서도 삶의 추구, 죽어서도 삶의 추구야. 다른 것은 있을 수 없어. 죽음의 영향력 앞에서, 나는 살아서는 병고침으로 저항하고, 죽어서는 부활의 소망으로 저항해. 삶이 아닌 다른 것은 죽음이요, 무의미요, 비현실이요, 나는 이따위 것들과 결코 짝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어. 이렇게 생각을 고쳐 먹으니 기도할 수 있었어.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꺼림찍 하더나,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이전과 달리.

  그리고 내 손에는 야고보서가 들려졌어.



WRITTEN BY
파다고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