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띠, 안녕.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우리 가족들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중이야. 4월은 정말 더디 가더라.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서 야고보서를 읽던 때가 정말 오래 전 일처럼 느껴져. 늙은 느낌이랄까. <마의 산>에 보면 산 아래보다 산 위의 요양원의 시간이 더디 간다고 하잖아. 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병원은 생명이 시공으로 나타나기도하고, 다시금 사라지기도 하는 기묘한 공간이야.


  저 위의 말을 쓰고 이틀이 지났어. 오늘은 너에게 말하리라.


0.


  아버지 얘기부터 해볼까. 아버지는 요새 산에 자주 다니셔. 아마 엄마 없는 집에 계신 것이 괴로워서 그러신듯해. 하지만 아버지의 잦은 산행은 엄마 때문만은 아니야. 아버지와 대화 중에 세월호 문제에 대한 의견이 서로 완전히 갈렸고, 이 때문에 아버지는 나와 대화하기를 별로 안좋아하셔. 너는 국가 체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길게 글을 쓸 수 있겠지. 





  아냐. 그냥 말나온김에 쭉 얘기해볼까. 아버지의 담론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어. 


1. 정치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닫혀있음


2. 따라서 바뀔 수 없는 일에 대한 대규모 집회는 국가를 불안정하게 만들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음


3. 그럼에도 자꾸 대규모 집회를 하려고 하는 젊은 세대들은 국가의 위태로움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여기서 '종북'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로 떠오른다)


  이런 식의 논리였는데, 대부분의 아버지 또래가 이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대화를 하면서 계속 아버지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해드리기 위해 화법을 조절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대화는 커녕, 서로 선 긋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을거야. 그리고 이것저것 예들을 들어가며, 내 생각을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전하기 위해 애썼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독교'에 대한 의견도 아버지와 상이했는데, 나는 저런 생각이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이를 긍정하지 않았어. 그러니 우리는 '기독교'라는 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그에 대해 다른 내용을 채워넣고 있는거야. 


  나는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하나는 '차근차근', 다른 하나는 '의견과 인격의 분리'. 물론 둘 다 엄청나게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차근차근

  누구나 그렇듯, 사람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로 둘러싸여 살고 있잖아. 이런 상황 속에서 타인과의 대화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주 중요한 문제야. 너와 나 역시,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도 바라보는 방식이 많이 달라. 나는 그 '다름'이 왜 나왔는지에 대해서 차근차근 살펴보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저 다른 상태로 내버려두는 것이 '다름을 인정'하는 방식이라면, 그런 방식에는 서로 다른 것이 만나 새로운 것을 창조해나갈 어떠한 접점도 없어. 저 '달리'라는 말이 세계관인데, 결국 대화는 세계관의 차원에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말이야. 서로의 세계관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면, 대화는 피상적인 차원 속에서 끝없는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어. 그러니 차근차근 사건에 대한 다른 이해에서부터 깊이 파들어가 그 차이를 좁혀나가야 해. 이 차이를 좁혀나간다는 말이 참 멋있지 않아? 대화를 통해서 차이를 좁혀나갈 수 있다는 것은, 무언가 하나의 토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해. 하나의 토대! 이 하나의 토대라는 말을 무슨 다양성 말살하는 것처럼 듣는 사람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야. 만일 사람들이 서있는 토대가 각각이라면, 그리고 그 각각의 토대들이 모두 틀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대화할 필요가 없어. 그저 자신이 서있는 토대 위에서 살면 될테니까. 그러나 세월호 사건 때문에 분열된 정국을 보더라도, 각기 다른 토대 위에서 사고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이 서있는 토대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고, 함께 서있어야 할 공통의 '토대'를 형성하기 위해 대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느껴져. 다른 데 아니라, 우리 가족에서부터. 사고할 수 있는 하나의 토대를 찾는 일은, 지금의 분열을 잠재우고 함께 실질적인 고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기초작업이라 생각해. '차근차근'은 대화의 껍질을 벗겨나가면서, 그 토대에 접근하자는 말이야.


-의견의 다름이 인격의 부정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이 과정 속에서, 서로의 토대에 대한 비판은 그 사람 인격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되거나, 혹은 그렇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오해되기 쉬워. 이 점이 정말 답답한 점이기도 해. 누군가의 '토대'를 비판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 누군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야. 그러나 토대를 비판당한 사람은 자신이 그간 살아온 인생을 부정하는 것으로 듣는 것 같아.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 그러나 이 때 서로 기분 나빠할 필요 없어. 그럼 그 비판이 정당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같이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되지 않겠어? 물론 하루 아침에 끝날 일은 아닐거야. 한 달이 걸리던 1년이 걸리던, 두려움 없이 이런 대화들을 계속 해나가야 해. 아버지와도 대화를 이어나갈거야. 그 과정 중에서 나도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 중요한 것은 관철이 아니라, 대화니까. 함께 만들어감이니까, 어쨌거나 문제가 되는 지점들을 찾고, 그 지점들을 면밀하게 검토해보는게 필요해. 때때로 우리는 설익은 개념들을 가지고 서로의 입장차이만 부각하며 싸우는 경우가 많잖아?

  

  지난번 편지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던 말이 있었지.


  예수는 시제를 바꾸었어. 시간을 뒤집었어. 부활할 것이라 말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인격화된 부활이라고 말했어. 예수는 역경을 이겨낸 삶 그 자체야. 곧 부활이야. 먼 머리에나 있었던 그 소망이, 예수를 통해서 마르다의 현재로 돌입한거야. 먼 미래에나 있을 '참 인간다움'의 소망이, 현실에 이뤄진 것이 예수고, 그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은 그 소망을 현재화하게 되는 거야. 이것이 복음이고, 구원이야! 말이 복잡하지만 사실 어렵지 않아. 꿈이 이루어 지는 거야.


  이 내용은 이렇게 문장 몇 개로 처리하고 넘어갈 수 있는게 아니었는데, 내가 정말 불친절했구나. 저 시제를 바꾸었다는 말에 대해서 내가 가진 토대들을 밝혀볼게. 읽어보고 다시 대화해보자. 서로의 토대를 밝히 드러내고. 내용이 너무 장황해지지 않도록, 다음의 문장으로 요약해서 설명하고자 해. 


"과거의 소망이 확인되고 재해석되었다"


  먼저 '과거의 소망'에 대해서는 구약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가진 바람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할거야. 그리고 '확인되고'는 먼 미래에 이뤄질 것이라 생각했던 구약시대 사람들의 소망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이뤄진 이야기를 할거야. 부활에 대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재해석'은 그 이뤄진 소망, 부활 때문에 성경 전체의 의미가 재해석되었다는 것을 짧게 요약해볼거야. 그럼 내가 앞서 말했던 "예수가 시제를 바꾸었다"는 말이 더 구체적으로 들릴 것이라 생각해.


1. 과거의 소망


  생각이 뜬구름 잡는 개똥철학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발바닥을 땅 위에 딱 붙여놓는 것이 중요해. 나는 글을 쓸때면 여러 번 이카루스가 되곤 하는데, 역사적 사료를 뒤지고 찾는 일이 귀찮아서, 그저 머리 속에 추상 개념을 만들어 놓고 이리 저리 굴리고 정리해서 만족하는 경우야. 그런데 그러다가는 추락하고 만다구. 이런 추락에는 날개가 필요한게 아니라, 역사의식이 필요해. 역사적 사건에 단단히 뿌리내린 나무만이 사상의 열매를 맺을 수 있어.


  예수 이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것이 구약성경인데,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이 사람들이 무엇을 소망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 물론 구약성경 뿐만 아니라, 당시 쓰였던 여러 문헌들을 조사해야지. 성경이냐, 아니냐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은 어떠했느냐'야. 역사가가 밝히려는 목적이 여기에 있어. 그리고 당시의 세계관 없이는, 그 당시에 쓰인 글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아마 성경을 읽으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 


  기독교 신학이 오랫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던 주제들이 있었어. 예컨데 우리가 자주쓰는 말인 '구원', '은혜', 천국' 이런 말들은 익숙하지만, 그 의미가 모호한 단어들이야. 그런데 뿌연 안개가 낀것처럼 여러 학자들이 각기 다른 의견들로 갑론을박하던 주제들이, 당시의 세계관 연구를 통해 한 목에 꿰뚫릴 수 있음이 밝혀졌고, 이건 지금도 신학계의 큰 이슈야. 그리고 지난 번 너에게 얘기했던 톰 라이트가 그 중심에 있어. 그의 작업은, 역사로 접근해서(그는 자신을 '역사가'라고 칭하는데) 당시의 세계관을 재구성하고, 그 세계관의 안경으로 텍스트를 다시 읽어내는 작업이야.





  그의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구약 사람들의 세계관을 알 수 있어. 알 수 있다는 말은, 우리가 과거를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야. 다만, 그는 세계관을 '삶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라 설명하고, 다음의 큰 질문들을 제시하고, 저 질문들에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어찌 답할지에 대해 연구했던 거야.


1) 나는 누구인가?

2) 문제는 무엇인가?

3) 해법은 무엇인가?

4) 여기는 어디인가?

5) 지금은 언제인가?


  에띠, 너라면 저 질문에 어찌 대답하겠어? 동시대인들에게 저 질문들은 답없는 숙제와 같은 질문들이야(청소년들에게 저 질문을 많이 던져본 나로서는 그렇게 판단할 수 밖에). 하지만 A.D.1세기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어. 그들은 저 질문들에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었어. 당시 A.D.1세기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지배아래 있었고,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겪었던 출애굽 이야기를 붙잡고 있었어. 만일 타임머신을 타고 2000년전으로 돌아가, 유대인에게 저 질문들을 던져본다면, 아마 이렇게 대답할거야.


1)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2) 문제는 무엇인가?

"지금 하나님의 백성을 폭정으로 다스리고 있는, 제국 로마가 문제입니다."


3) 해법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파라오를 치시고 이스라엘을 건져내셨듯, 우리 민족도 로마로부터 건져낼 것입니다."


4) 여기는 어디인가?

"여기는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지만, 지금은 로마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약속의 땅이 식민지가 되어버렸고, 우리는 여기에서 살고 있습니다."  


5) 지금은 언제인가?

"지금은 가나안 땅을 빼앗기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시절과 같은, '포로기'입니다. 그런데 이 포로기가 끝나면, 의로운 유대인들은 모두 부활할 것이고, 우리는 이 약속의 땅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A.D.1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살았던거야. 위의 내용중에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얘기해줘. 이 글은 아마 계속 피드백을 받아 업데이트를 해야할거야. 지금은 그저 손가락이 가는대로 대강 정리해보는 정도야. 자세한 내용을 내 블로그의 '성서 전체 이야기', '마가가 목격한 역사' 라는 이름으로 써둔 것이 있어. 여하튼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이스라엘은 로마와 무력 대 무력으로 맞붙을 준비를 하고 있었어. 그리고 A.D.70년에 정말 로마와 붙었다가,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없어져버려. 남은 소수의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 (네가 읽었던 서경식씨 책 제목처럼) 디아스포라로서 살게 되고.

  중요한 것은 이들의 소망이야. 당시 이스라엘 안에서도 유혈혁명을 주도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고 있었는데, 이 부활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야. 특히 당시 유대인들이 자주 애송하던 것은 다니엘서였는데, 그 다니엘서에서는 이 땅을 괴롭게 하는 짐승들을 심판하는 한 사람과, 그 사람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내용이 나오거든.(자세한 내용은 여기) 이 A.D. 1세기 유대인들은 두 가지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자신들의 소망을 표현했어. 하나는 악에 지배당하고 있는 '현시대'.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오셔서 다시 세계를 바로잡으시는 '오는 시대'. 그리고 이 현시대가 끝나면 오는 시대가 찾아오고, 이 시대의 변화를 의로운 사람들의 부활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거야.

  

  이런 유대인들의 생각은 낯선 것만은 아니야. 만일 귀가 막힌 정부를 '악'으로, 그리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 운동가들을 '의인'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이 믿었던 것은 다른게 아니라, 악인 정부를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웠던 이들의 부활이야. 그리고 그들이 부활할 때는, 정말 악이 심판받고 정의가 완성되는,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고, 소망이었던거야. 다만 여기에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악은 로마고, 의인들은 그 로마와 싸우다 죽었던 순교자들을 뜻하는 것이었어.


  그들에게 정의로운 시대, 새로운 시대는 늘 미래의 일이었어. 현실은 늘 포로기로 인식되었지. 이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그들의 갈망이었으나 현실은 늘 그렇듯 녹록치 않았어. 게다가 그들이 맞서는 로마는 정말 강력했는데, 로마는 자신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십자가에서 말려죽였어. 그럼에도 부활과 광복의 소망을 믿은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목숨을 던졌지.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의 지식인들은 성경 해석을 통해, 그렇게 죽는 순교자들을 띄우고, 다같이 더 과격하게 움직이자고 사람들을 선동하기도 했어.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임당하던 무수한 랍비들은 하나님이 우리 대신 복수해주실 거라는 로마에 대한 서슬퍼런 유언도 잊지 않았어.

  이상의 내용들에 대해서 함께 이해해볼 것을 권해. 이미 가지고 있는 톰라이트의 <기독교 여행>이란 책도 같은 내용이니 도움이 될 것이고, 나는 어떠한 주제든 너와 대화하기 위해 항상 대기중이야.



  지금 써놓은 것들을 수정 보완하면서, 다음 달에 "2. 확인되었다" 를 마저 써볼게.



WRITTEN BY
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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