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12

대소동이 가라앉자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오게 했다. 그는 그들을 격려하고 작별 인사를 한 후에 마케도니아로 가려고 나섰다. 그는 그 지방을 지나면서 많은 말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리스에 도착하자 그곳에서 석 달을 머물렀다. 그는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가려고 했지만,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며서 마케도니아를 거쳐 돌아가기로 했다.


  3년간 정들었던 에베소를 떠나,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에 오르는 긴 여정에 오릅니다.  에베소를 떠나기 전에 에베소에서 만난 제자들을 불러, 이 마술과 우상의 땅에서 복음으로 살기로 한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그의 이동경로를 살펴봅시다. 지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마케도니아 쪽으로 가고자 합니다. 마케도니아로 올라가는 길에는 드로아라는 도시가 있는데,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로 보낸 디도와 드로아에서 만나서 함께 움직이기로 했습니다.(고린도후서 2:12,13) 그러나 만나지 못하고 홀로 마케도니아로 떠납니다. 마케도니아는 에게해 윗쪽 지방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데살로니가와 빌립보가 그 지역에 속해 있습니다. 바울은 이 공동체들에 들러 그들을 격려하고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해 아가야로 갑니다.


  이 아가야 지역에는 고린도와 아테네가 있습니다. 이 시절 쓰인 편지가 고린도후서와 로마서입니다. 이미 고린도전서는 전해졌고, 이 편지로 인해 고린도 공동체는 여러 잘못된 부분들을 바로 잡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의 마음은 가벼웠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심경을 담아 고린도에 두 번째 보냅니다. 그것이 고린도후서입니다.


  바울은 그리스 지역에서 석달을 머물고 배를 타고서 시리아로 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음모가 있어서 항로가 아닌 육로를 택합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바울이 배를 탈 것으로 예상하고, 그를 습격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다시 왔던대로 길로 돌아서 예전에 디도를 기다렸던 드로아 지방에 다시 도착합니다.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 사람 가이오와 디모데, 그리고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가 이번 여행에 함께 했다. 그들은 앞서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렸고, 우리는 무교절이 지난 뒤에 빌립보에서 배를 탔고 닫새 후에 드로아에서 그들을 만났다. 우리는 그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가 있습니다. 이들이 먼저 드로아에 도착해서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고, 바울은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서 드로아로 마침내 들어왔습니다. 이 친구들의 명단을 보면서 충격을 받습니다. 마치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는 듯 합니다. 출신지역이 전혀 다른 청년들이, 메시아 예수의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유대에서 시작된 복음은 온 땅으로 퍼져나갔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바울의 편지대로,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신실함 하나로 하나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모인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다른 서신서들을 통해 단서들을 모아보면, 이들은 모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각자 자신의 공동체에서 헌금을 가져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둘러싸인, 가난하고 위기의 연속인 '그 교회'를 돕고자 함입니다. 그 교회가 이방 교회들에게 복음을 전달해주었다면, 이제 이방 교회들은 그들을 위해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15:26~28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낼 구제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신령한 복을 나누어 받았으니, 육신의 생활에 필요한 것으로 그들에게 봉사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마치고, 그들에게 이 열매를 확실하게 전해 준 뒤에, 여러분에게 들렀다가 스페인으로 가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6:1,2

성도들을 도우려고 모으는 헌금에 대하여 말합니다. 내가 갈라디아 여러 교회에 지시한 것과 같이, 여러분도 그대로 하십시오.

매주 첫날에, 여러분은 저마다 수입에 따라 얼마씩을 따로 저축해 두십시오. 그래서 내가 갈 때에, 그제야 헌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 주 첫날에 우리는 빵을 떼기 위해 모였다. 바울은 다음 날 아침 떠날 작정이었다. 그는 그들과 토론을 했는데 한밤줄까지 계속 말했다. 우리가 모여 있던 다락방에는 등불 몇 개가 타고 있었다. 유두고라고 하는 청년이 창가에 앉아 있었는데 바울이 말을 계속하자 졸음이 몹시 쏟아졌다. 그는 순간 잠에 빠져 3층 창밖으로 떨어졌는데,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


  이 하나님의 우주 가족은 함께 예수님의 살점을 떼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리고 밤이 새도록 복음과 공동체와 온세계에 대한 토론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전기가 없을테니, 등불 몇 개가 어른거리는 어둑어둑한 방안에서, 음영이 짙게 드리워진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화를 이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유두고라는 청년이 밤늦은 시간 길어지는 바울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고 밀려오는 잠에 잠깐 눈을 감았을 때, 중심을 잃고서 3층 창밖으로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고 누가는 기록합니다. 


  이 내용은 우스개소리로 설교시간에 졸아서는 안된다고 말할 때 언급되기도 합니다만, 그 이상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날이 그 주의 첫날이요, 주일은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었고, 그들은 빵을 떼며 메시아 예수의 살점을 먹었을 때, 그들이 소망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부활이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이 새 가족 안에서, 한 청년의 예기치 못한 죽음과 다시 살아남은 단순히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는 태도를 비판하기 위함이 아닐 것입니다.


  바울이 내려가서 몸을 숙여 그를 일으키면서 말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의 호흡이 그 안에 있으니 말입니다."

  그는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서 빵을 떼어 그들과 함께 먹고는 새벽까지 계속 이야기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떠났다. 그들은 살아난 청년을 데려갔고 크게 위로를 받았다.


  부활의 실재.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 공동체를 통해서 이루시는 생명력. 그가 기절한 것인지 죽은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리한 번역일지 모르겠지만, 바울이 이때 한 말은 "그의 호흡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입니다. 바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말을 한 것인지, 우리는 추측해볼 뿐입니다만, 여기서 "그의 호흡"이 단순히 유두고가 작게 나마 숨을 쉬고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예수의 호흡 곧 성령이 유두고 안에 있어, 그 성령의 능력으로 이 위기를 전복시킨 것인지 아니면 양 쪽 다인지 생각해봅시다. 주어진 단서에서 확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어찌되었든 위기는 극복되었고, 하나님의 가족이 빵을 떼고 함께 대화하는 일은 계속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까지도 말입니다. 다시 살아남의 소망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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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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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9:23~41
그 무렵 그 돈 때문에 큰 소란이 일어났다. 은으로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만드는 데메드리오라는 은세공인이 있었는데, 그의 일꾼들은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 그가 일꾼들과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다 불러 모으고 말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우리가 그래도 잘 사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하는 이 일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바울이라는 사람이 에베소만이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역을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삶의 방식을 바꾸라고 설득하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보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떳떳한 우리 사업에 불명예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위대한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전을 무시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아르테미스는 위엄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아시아 전체가, 아니 온 세상이 그 여신을 숭배하지 않습니까!"

  일이 벌어졌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그 일은 돈과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봤었던 내용이 기억날 것입니다. 바울의 선언한 복음과 그 복음이 가져온 하나님의 능력이 에베소 지역의 무수한 마술사들의 허위를 폭로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30억 상당의 마술 서적을 불태웠습니다. 이런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을 때, 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른 류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장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며, 이 새로운 조류를 막아서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거니시던 예루살렘에도 있었고,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에베소에도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 대한민국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으로 인해 에베소에서 마술이 더이상 돈벌이가 되지 않는 모습을 목격한 더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은으로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겼습니다.




  여러개의 젖가슴을 달고 있는 풍요로움의 상징인 이 아르테미스 여신은 에베소의 수호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이 아르테미스 신앙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바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아르테미스는 그저 사람이 만든 우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 동안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만들어 부를 축적하던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메드리오는 자신의 생존권을 주장한 것이고, 더메드리오와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제 노조를 결성하여 단체 행동을 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외쳤다.
  "에베소의 아데미는 위대하다! 에베소의 아데미는 위대하다!"
  온 도시가 소동에 휩싸였고, 모든 사람이 서둘러 극장으로 몰려들어서 바울의 동행인 마케도니아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끌고 갔다. 바울은 들어가서 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추종자들이 못하게 했다. 바울에게 호의적이었던 그 지방의 치안관 몇 사람도 극장 안에 들어가는 위험을 무릅쓰지 말라고 충고하는 전갈을 보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외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외쳤다. 사실 그 집회 전체가 완전히 혼란에 빠졌고, 대다수 사람들은 애초에 자신이 왜 그곳에 왔는지도 알지 못했다. 유대인들이 알렉산더를 앞으로 밀었고, 무리 중 몇 사람이 그에게 자초지종을 알렸다. 그는 조용히 해 달라고 손짓을 하고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다함께 약 두 시간 동안 외쳤다.
  "에베소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

  은 세공업자들로부터 시작된 이 미움과 분노는 도시 전체를 집어 삼켰습니다. 이상하게도 나쁜 건 전염이 잘만 됩니다. 아, 이상하다는 말은 취소합니다. 사람의 좋지 않은 것에 잘 달라붙는 경향을 가리켜 타락이라 부릅니다. 악은 사람을 숙주로 삼아 자신의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이 곳 에베소에서 말입니다. 아르테미스는 에베소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것이 정작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르테미스는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를 보여줄 뿐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정작 바울은 찾지 못했고, 바울과 함께 다니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꿩대신 닭이라고 에베소의 야외 극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에베소의 야외 극장에는 약 2만 5천명 정도를 수용한다고 하니, 2만 5천명에게 둘러싼 이 두 사람의 공포를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2만 5천명의 성난 군중 소리치는 "에베소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 귀가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는 이 두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당장 야외 극장으로 달려가, 이 2만 5천명에게 연설을 하고자 합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러한 폭동이 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2만 5천명에게 한 번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을 잘 알고 있는 그의 친구들이 말립니다.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바울은 가난한 사람들만 사귀지 않았습니다. 에베소 지역의 공무원들 중에도 친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울의 성격을 뻔히 아는 그들은 바울에게 절대 극장으로 들어가선 안된다고 급히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소요가 더욱더 가열차지는 가운데, 누가는 그것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외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외쳤다. 사실 그 집회 전체가 완전히 혼란에 빠졌고, 대다수 사람들은 애초에 자신이 왜 그곳에 왔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 사람들은 애시당초 목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일행에 대한 원망과 살의로 가득차 있었다기 보다는 권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분전환으로 이 군중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뭔 일 났데?" 하면서 군중에 끼어서, "에베소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는 구호에 자신의 목소리를 그저 뜻없이 더했을 것입니다. 정말 말 그대로 '군중심리'입니다.


  이 와중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똑똑하고 재리에 밝으며,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려는 폐쇄성을 고집하는 유대인들은 어느 민족에게나 미움을 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어디로 튈줄 모르는 군중들이 혹여나 미운털이 박혀있는 자신들에게 화살을 돌리지 않을까 걱정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라는 유대인을 내세워 자신들의 무고함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유대인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 사람들은 무언가 이유나, 논리나, 뜻을 알고 싶어서 모인게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기분전환 중입니다. 이렇게 외치면서 말입니다. "에베소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그 시의 서기관이 무리를 조용히 시키고 말했다. "에베소 사람들이여, 우리 도시 에베소가 위대한 아르테미스의 고향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그 신상이 있는 영예로운 곳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진정하고 무모한 일을 삼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들을 여기에 데려왔는데, 그들은 신전에서 도둑질을 하지도 않았고 우리 여신을 모독하지도 않았습니다. 데메드리오와 그의 동료들이 누구를 고소할 일이 있으면, 법정은 열려 있고 치안관들도 있으니, 그들이 서로 소송을 하게 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그 이상을 알고자 한다면, 공인된 집회에서 처리해야 합니다. 오늘 이 폭동 때문에 우리 자신도 법적 절차를 거칠 위험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 소동을 충분히 설명할 만한 어떠한 이유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이렇게 말하고 집회를 해산시켰다.

  서기관이 등장합니다. 그는 고린도 법정의 갈리오처럼, 바울을 돕는 연설을 합니다. 바울과 어떠한 관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의 연설 내용은 이러합니다. 일단 아르테미스를 치켜세워줍니다. 본문에 "하늘에서 내려온 그 신상" 이라는 말은, 아마도 최초의 아르테미스 여신상은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르테미스를 치켜세워준 서기관은 바울을 옹호합니다. 그가 도둑질을 하거나 아르테미스를 직접적으로 모독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문제를 해결하는 합리적인 절차를 말합니다. 로마의 절차란 총독에게 이 일을 알려서 재판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경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같은 절차를 거쳐 예수를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총독들이 가장 꺼려하는 것이 바로 폭동입니다. 신인 황제가 다스리는 로마는 조용해야 합니다. 폭동이 일어났을 때 가장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사람이 총독입니다. 그래서 총독은 어떻게든 민중들의 폭동만큼은 막아보려 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가 무죄임을 알면서도 군중들의 결정에 참견하지 않기로 한 것은,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명분도 없는 폭동을 일으켜 총독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더 나아가 로마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돌아오는 것은 십자가형뿐입니다. 사람들은 이 일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제 정신을 차리고서 뜻없이 모였던 그 자리에서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에베소의 사람들이 아르테미스에 열광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오늘날의 아르테미스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그 앞에서 어떤 태도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밤입니다. 아리송한 질문들 속에 분명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사람은 잘못된 정체성이라도 그것을 붙잡고 고집부릴 수 있고, 심지어 그 고집은 집단적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정체성은 이익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 앞에서 바울은 결코 굴하지 않았다는 사실 속에서, 그의 정체성을 더욱 알고 싶어 집니다. 닮고 싶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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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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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9:11~22
  하나님이 바울의 손을 통해 비상한 능력을 행하셨다.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 닿았던 손수건이나 수건을 병든 사람들에게 얹고는 했는데 그러면 병이 낫고 악한 귀신이 떠났다.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등장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손을 통해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바울의 몸이 닿았던 물건들에 조차도 '능력'이 있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에베소라는 도시는 온갖 마술과 주술이 성행하던 곳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미에 마술 관련된 책을 불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 태운 마술관련 서적의 값이 노동자 5만명의 일당에 달하는 금액이라니(6만원이라고 계산하면, 30억 정도입니다.), 이 도시가 얼마나 '능력'과 관계된 일에 심취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도시에서 하나님은 참말로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메시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마치 이집트에서 출애굽할적에 사람들이 숭배하는 우상의 허위를 폭로하고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에베소 사람들의 우상들을, 말씀의 능력 아래 꿇리십니다. 그 능력 앞에 죽음의 영향력(병)은 소멸되고, 왜곡된 인격(귀신)은 치유됩니다.

  바울이 이곳 에베소에서 썼던 편지로는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를 들 수 있는데, 그 편지들에서 왜 '능력'이라는 단어가 자주 반복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악한 귀신에 들린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귀신을 쫓아내려 시도하며 떠돌아다니던 유대인들이 있었다.
 "바울이 선포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네게 명한다!" 라고 그들은 말했다.
  이런 일을 하던 사람들 중에 유대인 대제사장 스게와 일곱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한번은 악한 귀신이 그들에게 물었다.
  "내가 예수를 알고 바울도 잘 아는데, 당신들은 누구요?"
  악한 귀신에 들린 남자가 그들을 덮쳤는데, 그 힘이 강하여 그들 모두를 제압해서, 그들은 벌거벗은 채 상한 몸으로 그 집에서 달아났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모두가 이 일을 알게 되었다. 그들 모두가 두려워했고, 주 예수의 이름을 찬양했다.

  에베소는 작은 도시가 아닙니다. 당시 마술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지중해 연안 도시들 중 손에 꼽을 만한 큰 도시였습니다. 그런 도시에서 바울이 워낙 유명해지니까, 바울을 사칭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누가는 '스게' 라는 이름의 유대인 대제사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이 '대제사장'이라는 직책도 사기일 확률이 놓습니다. 유대인들의 대제사장 목록에 '스게'라는 이름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사기꾼 스게와 그의 일곱 아들들은 바울이 선포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왜곡된 인격을 제압하려 애썼습니다.

  몇 번은 잘 되는듯 싶더니 한 번은, 악한 귀신이 "당신들은 누구?"라고 물었습니다. 이 귀신의 질문이 참으로 정곡을 찌릅니다. 예수를 믿지도 않으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려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말 그대로 '근본없는 사람들'입니다. 귀신은 이 근본 없는 이들을 역으로 제압해버립니다. 여기서 누가는 재치있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카라.퀴리오'라는 단어인데(본문에는 "힘이 강하여 그들 모두를 제압해서"라 되어 있습니다), '카타'는 '아래로'라는 뜻이고, '퀴리오'는 '주님'할 때 그 '주'입니다. 즉 귀신이 그들을 '아래로 짓눌러 주인 노릇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비참한 지경에 이른 스게 일당들은 홀딱 벗겨진 몸으로 달아났습니다. 에베소에 이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스게 일당의 소문이 알려지자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미 예수를 믿던 많은 사람이 공개적인 고백을 하러 나와서 자신들이 그때까지 했던 일을 밝혔다. 마술을 하던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책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불태웠는데, 누가 그 값어치를 계산해 보니 은돈 5만 닢에 달했다. 그렇게 말씀은 주의 능력을 따라 자라났고 강했다.

  이미 예수를 믿던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죄를 밝혔습니다. 마술을 믿고 있던 이들은 마술관련 서적들을 가져와 모두 불태웠습니다. 금액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30억쯤. 당시로 은돈 5만닢. 그렇게 말씀은 주의 능력을 따라 자라났고 강했습니다. '왜곡된 인격'이 자신의 능력을 기세등등하게 떨치며,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비인간적인 행위와 뜻모를 주문에 집착하게 만들었던 그 에베소에서, 하나님이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말씀과 능력을 통해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 바울은 다시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까지 가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정하고 말헀다.
  "그곳에 들렀다가 반드시 로마에도 가 보아야겠습니다."
  그는 자신을 돕는 사람들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먼저 마케도니아로 보내고, 자신은 아시아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놀라운 일들이 벌인 당사자인 바울은, 에베소에 눌러 앉기는 커녕 이제 떠날 채비를 합니다. 본문의 저 "마음속으로"라는 말에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원어로는 "영으로 결정했다"고 되어있는데, 혹자는 그 영이 성령을 가리킨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혹자는 바울 자신을 가리킨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영'은 오늘날로 하면 '인격'이고, 바울이 하나님의 인격과 늘 교제하며 고민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바울의 결정은 분명 하나님의 뜻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무리없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저 바울의 생각을 따라 사도행전의 남은 내용들이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21~28의 주제는 바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입니다. 이 여정은 누구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 분도 갈릴리 촌구석에서 시작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셨고, 그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지배자들에게 붙잡혀 로마 총독 앞으로 압송 되셨습니다. 바울의 마지막도, 이 사람과 판박이입니다. (바울이 '어떤 상태로' 로마에 가게 되는지 알게 되면, 더욱 더 그 비슷한 결말에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바울은 일단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먼저 마케도니아로 보냅니다. 자신은 에베소에 좀 더 시간을 보냅니다. 바울도 이들과 함께 마케도니아로 일찍 떠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시간을 조금 더 보내기도 했을 때, 에베소에서는 큰 폭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내일 살펴볼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 폭동 앞에선 바울에게, 분명히 할 말과 할 일이 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에베소에 조금 더 오래 남아있게 하셨다는 생각도 듭니다. 놀라운 것은, 바울이 "마음속으로 결정"한 것들을 따라 하나님의 역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무엇을 결정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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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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