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천한 자가 나름 이해해보겠다고 이 아침에 성경을 풀어 적어보았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분명한 것은, 저 첫 줄에 "내 형제자매들이여"를 읽었을 때, 바울은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귓가에 속삭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령으로 연결된 바울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글자를 전달함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우리가 연대하고 있음을 글자를 통해 확인할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26~31
내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의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있는 사람'이라고 할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힘있는 사람도 없었고, 귀족으로 태어나 출신 배경이 좋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있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 기준으로 볼 때 힘없고, 출신 배경도 없고, 지혜 없는 이들을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마치 출애굽했던 히브리 노예들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택하셨으니, 힘있는 자들의 힘을 폐하시려고 심지어 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신실한 사람들을 새로이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떠한 피조물도 그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누구인지가 분명합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은 메시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 메시아가 우리를 위해 '지혜, 즉 하나님의 인격적 임재'가 되셨고(이것이 지혜의 바른 의미입니다.), 또한 '올바름'과 '구별됨'과 '풀려남'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에 기록된대로 "누구든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히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뚜렷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이 새로이 창조된 것입니다.

  풀이를 저녁 때 써보려고 합니다. 오늘 하루 이 구절들을 씹고 맛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걸음 걸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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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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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0~17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이제 나는 우리 주 메시아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같은 말을 해야 하고,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어야 하며, 같은 생각과 같은 지식으로 온전히 하나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제 바울이 모든 메시아 예수의 에클레시아에 은혜와 평화를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초대 교회 공동체가 문제가 없이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었다가, 그것이 나중에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쉽지만, 오늘 우리가 보는 편지에서는, 이미 서로 다른 사람들이 메시아의 이름으로 하나된다는 것은 퍼즐조각이 불협화음 없이 딱 들어맞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을 붙잡고, 매순간 선택의 순간 속에서 깨어있어야 하는 일이었고,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말, 같은 생각, 같은 지식을 갖는다고 해서 다양성이 사라지고 획일화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집단이든 그 집단은 공유하는 말과 생각과 지식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들이 하나됨을 위해 섬기는 것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제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말과 생각이 하나되었으나 잘못된 지식 때문에 참된 하나를 이루지 못한 것이 바벨탑입니다. 그러나 오순절날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 오셨을 때, 그들은 새로운 언어를 받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지식으로 바벨의 추악한 역사가 뒤집혔습니다. 따라서 에클레시아는 성령을 말하고, 성령을 생각하며, 성령을 통해 얻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성령은 바벨을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입니다. 그 성령으로 숨 쉬는 에클레시아가, 온전한 하나됨을 이 땅에 구현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글로에의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분쟁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내게 생생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내가 하려는 말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각각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메시아 편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문제를 더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지금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분열하고 있습니다. 분열은 중심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중심은 하나여야 합니다. 둘 일 수 없습니다. 가운데 중(中)이 보여주듯, 위로부터 아래로 꿰뚫린 것은 하나 뿐입니다. 그런데 거짓 중심은 여럿입니다. 이 거짓 중심을 보여주는 말이 "편"이라는 말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바울 편이라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개척한 사람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이 아볼로 편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이 아볼로에 대해서 사도행전 18장에서 이미 살펴보고 왔습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로부터 진정한 중심에 대해서 배운 아볼로는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섬기기 위해 아가야로 떠났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 아볼로는, 고린도에서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그를 거짓된 중심삼는 사람들 마저 생겨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군가는 베드로 편이라 말합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와 베드로가 어떠한 관계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메시아 편이라고 합니다. 그런 이 사람들은 옳은 것입니까? 메시아라는 말 뒤에는 '편'을 붙일 수 없습니다. 메시아가 하나됨의 이름인데, 이 하나의 이름으로 분열을 낳는 교묘함이 '메시아 편'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습니다. 아마도 '메시아'라는 이름을 내걸고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야구경기가 생각났습니다. 편을 나누어 서로 주도권 경쟁을 하는 구도 말입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게다가 에클레시아에 속한 이들은 주도권을 가지고 싸워야 할 경쟁상대들도 아닙니다. 당시 고린도는 그리스 로마 철학의 홍수였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제자를 삼으며 철학 학파를 만드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말을 가지고 하는 경쟁이었고, '어디가 강한 팀인가'는 오늘날처럼 사람들의 관심거리였습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자신들을 말을 가지고 경쟁해야 하는 철학학파로 오해한듯 합니다.


  메시아께서 나뉘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달렸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따라서 여러분 가운데 누구도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스데바나와 그의 가족들에게도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 외에는, 내가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모릅니다.) 요점은 이렇습니다. 메시아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지혜의 말로 하지 않았으니, 만일 지혜의 말로 한다면 메시아의 십자가는 그 능력을 잃을 것입니다.


  이러한 분열에 대해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에클레시아의 방법은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말을 가지고 주도권을 얻으려는 철학학파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를 세례와 연결시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 '세례'에 대해서 바울은 설명할 것이지만, 그 전에 이미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를 '편'으로 오해해선 안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세례는 세례를 베풀어준 사람의 제자가 되어서 그들끼리의 분파를 만들라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는 십자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례는 죽고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고 사는데 '생존'과 '편나눔'은 같이 죽어버립니다. 세례받은 이에게 이것들은 추구할 바가 못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보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났던 회당장 그리스보가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리스보가 바울편인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세례는 생사(生死)가 아닌 사생(死生)을 위해 받는 것이요, 이것은 편나눔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은혜를 베푸사 진정한 하나됨을 주시는 하나님의 복음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복음으로 편을 나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십자가로 살아가는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그저 세상의 철학 학파중 하나로, 스포츠 팀의 하나로 전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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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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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사도행전을 이쯤 살펴보고 이제 고린도전서로 들어갑니다. 바울이 고린도와 그 근처인 에베소에서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 우리는 이미 충분히 살펴봤습니다. 머리 속으로 그의 여정을 그려놓고, 이제 그의 글 속에서 우리가 상상했던 바울이 맞는지 확인할 차례입니다.


고린도전서 1:1~9

  하나님의 뜻에 따라 메시아 예수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과 우리 형제 소스데네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에 이 편지를 보냅니다. 여러분은 각처에서 메시아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메시아 예수 안에서 거룩해졌고, 거룩함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그이는 우리뿐 아니라 그들의 주도 되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메시아 주 예수로부터 은혜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일단 소스데네가 보입니다. 이 사람은 사도행전 18장에 나온, 바울을 갈리오에게 고발하려고 사람들을 선동했던 회당장 소스데네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자신을 고발하려고 했던 이를 형제라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에 있는 '에클레시아'에 편지를 보냅니다. 아마도 이 편지는 세 번째 편지일 것입니다. 이미 고린도와 바울은 여러 차례 편지를 교환한 흔적들이 있습니다.(5:9, 7:1) 바울은 에베소에서 머물면서 근처 아가야 지역에 있는 고린도의 에클레시아와 편지를 교환했을 것입니다. 수신자를 고린도의 '에클레시아'로 원어를 가져다 쓴 것은, 이것을 '공동체'로 번역하기에도, '교회'로 번역하기에도 성이 차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클레시아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공동 생활을 하며 서로의 재산을 함께 사용합니다. 오늘날 교회와도 사뭋 다르고, 그렇다고 그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라고만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시 이 사람들의 독특함을 살려 그저 에클레시아라 일단 명명하겠습니다.

  본문에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표현은 계약관계를 전제합니다. 즉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특정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때, 그와 '언약'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언약에 신실함으로 반응함으로써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창세기 12장의 바로 앞 장이 바벨탑인 것을 기억한다면, 이는 실로 충격적인 관계의 전환입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원수 삼고 대적하던 장에서, 한 장 넘기고 나니, 사람이 부르심을 받고서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관계로 들어가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이스라엘의 토라 이야기에 대해서 잘 몰랐을테지만, 그렇다고 계약도 희미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린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도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특정한 계약 관계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 계약이란 복잡하고 다층적이지만, 고린도전서 첫 장에서 바울이 표현하는 바를 따르자면, '메시아 예수를 통한 거룩함'이라 요약할 수 있습니다. 거룩함은 '따로 떨어뜨려 놓는다'는 말입니다. 즉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 무언가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왔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무엇으로부터 따로 떨어지게 된 것일까요? 바로 이집트에서의 우상숭배하던 삶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비인간화로부터 이 사람들은 출애굽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거룩해질 것입니다. 죄로부터 떨어져 나가 점점 하나님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계약의 내용입니다. 메시아 예수를 통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되었고, 되어가고 있으며, 마침내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고린도의 에클레시아 뿐만 아니라, 전세계 곳곳마다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듣는 거리마다 기쁨으로 춤을 춥니다. 메시아 예수는 그들만의 주가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불러 거룩함에 이르는 모든 이들의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메시아 예수를 통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전세계를 연결합니다. 이들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온 세계에 퍼져있는 이 에클레시아들에게 은혜와 평화를 주십니다.

 ​ 나는 늘 여러분을 두고, 메시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두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그이 안에서 모든 것, 곧 온갖 언변과 지식이 풍성해졌습니다. 메시아의 증거가 여러분 안에 세워졌기에, 여러분은 어떤 영적 은사에도 부족함 없이 메시아 우리 주 예수께서 나타나시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이가 끝까지 여러분을 올바로 세우셔서, 메시아 우리 주 예수의 날에 흠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 아들, 메시아 우리 주 예수와의 '코이노니아'를 위해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의 뒷 쪽을 보면 알겠지만, 고린도의 에클레시아는 이 '은혜'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점이 있었고, 이로 인해서 '평화'가 깨졌습니다. 바울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번째 문단을 읽으면, 뒤에 이어질 문제들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문제는 바울이 쓴 그대로 1. 온갖 언변 2. 지식 3. 은사 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들을 풀어내기 전에 감사부터 합니다. 그들이 비록 말과 지식과 은사에 대해서 문제를 겪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거저 받은 말과 지식과 은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래부터 부정하다고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균형을 이루느냐,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바울은 메시아의 증거가 여러분 안에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이 증거가 무엇일까요? 저는 성령이라 생각합니다. 메시아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 하나님 계심의 근거 중에 그 보다 강력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 성령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 성령 계심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문제를 겪더라도 그 문제를 바로 잡고, 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실 것을 갈망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그들은 올바로 세워지고, 마침내 메시아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 그들을 완전하게 하시리라 기대합니다. 이 일이 지금은 요원해보일지라도 반드시 이뤄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계약의 내용이며, 하나님은 계약에 충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계약에 충실하신 이가 아들 메시아 예수를 보내시고, 그 아들의 승천에 이어 성령을 보내심은, 하나님과 에클레시아의 코이노니아 때문입니다. 이 말을 잘 곱씹어 보시기 바랍니다. 코이노니아는 '교제'라 번역되었습니다. 내 것 네 것 하지 않고 서로 같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에클레시아와 성령으로 하나되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에클레시아를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를 보니, 이 언약의 내용이 확실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의 짧은 서두에 아홉번이나 반복하는 그 이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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