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19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동안 아볼로라는 인물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에베소에 남겨놓은채 '그 교회'로 올라갔습니다. 그 동안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 '성령'에 대해서 배웠고, 그 성령의 교제에 참여하기 위해, 이제 회당을 떠나 고린도에 있는 공동체에 들어가,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이제 누가는 카메라를 돌려 다시금 에베소로 돌아온 바울에 주목합니다. 

사도행전 19:1~10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 바울은 내륙 지방을 거쳐 에베소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제자들 몇 사람을 만나서 그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믿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바울이 물었다.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대답했다.

  아마도 요한의 세례 운동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었던 요단강가와 에베소는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곳 에베소에도 요한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요한의 세례는 받았으나, 성령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습니다. 마치 메시아 예수에 대해서 논증했으나, 성령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아볼로처럼 말입니다.

  성경에 '제자'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만, 이 '제자'를 '온전한 사람'이라 읽어선 곤란합니다. 성경은 누군가를 스승으로 둔 사람을 가리켜 다 '제자'라 부릅니다. 심지어 성령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제자는 제자입니다. 그러니 이 단어에 너무 무게감을 실어선 안되겠습니다. 당신은 제자입니까? 사람은 태어나서 무언가를 배우며 살아가니 모두가 제자입니다. 제자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작 중요한 질문은 '제자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누구의 제자입니까?' 입니다.  메시아 예수의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했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뒤에 오실 분에 대해 말했고, 그 사람이 백성들이 믿어야 하는 분, 바로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를 믿는 것이, 성령을 받는 것과 밀접한 상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14장을 인용합니다.

요한복음 14:16~21
내(예수님)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곁에서 돕는 이'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숨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승천 이후,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임을 '알고', 또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이 일의 중심에 성령이 계십니다.
 
  요한은 새로운 출애굽을 예고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고한대로 모든 사람을 죄로부터 출애굽하시는 '인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예전에 모세와 같이 거짓왕을 파멸시키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유의 여정을 떠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의 여정은 광야의 여정이었고, 구름 기둥을 따르는 여행길이었습니다. 예수가 출애굽의 시작이라면, 성령은 '예수를 통해 시작된 사람들'을 인도하는 구름기둥입니다. 이집트에서 출애굽한 사람들은 생각없이 앞에 보이는 구름기둥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지만, 이 새로운 구름기둥은 사람의 마음 한 가운데로 들어와,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며 하나님의 길을 따라 나아갑니다. 하나님 임재의 구름을 가슴에 담은 성전들이, 그렇게 현시대의 광야길을 헤쳐나갑니다.

  예수는 출애굽의 시작이요, 성령은 광야의 인도자라 하겠습니다.예수를 믿었는데 성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언약백성 신분에 걸맞지 않은 일입니다. 속에 계신 성령을 슬프게 하는 가슴 아픈 경우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러고나서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은 방언을 하고 예언을 했다. 그들은 모두 열두 명쯤 되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40일 뒤,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일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열 두 명의 요한의 제자들은, 이제 성령을 받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129명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방언을 하고 예언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렇게 성령을 받는 경우를 여러 차례 묘사했습니다. 먼저는 앞에서 언급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졌고, 8장에 가면 베드로와 요한에게 안수를 받은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성령 안에서 일하고 있는 바울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10,11장에서는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이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을 받는 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소용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기준, 믿음 뿐입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습니다.

  바울은 회당으로 들어가서, 석 달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해 논증하고 설득하며 담대히 말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이 마음이 완고해져서 믿지 않으며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도'에 대해 근거 없는 못된 주장을 하자 바울은 그들을 떠났다. 그는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두란노 학당에서 날마다 논증했다. 그는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아시아의 모든 거주민이 주의 말씀을 듣도록 이 일을 2년 동안 했다.

  이 믿음 하나만으로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이야기가 유대인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통해 메시아와 성령을 새롭게 이해한 바울의 말들'은, 유대인 회당에서 담대하게 말해야 하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서 말해야 하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자신의 목숨조차도 하나님의 드러남과, 유대인들에 대한 긍휼을 더 귀히 여길 때 할 수 있는 말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논증하고 설득합니다. 누가는 "몇몇 사람이 완고해져서"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단순히 바울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로마서 9-11장의 안경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보여주는 '완고함'이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방법이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서잉 출애굽하기 위해서 파라오가 '완고해진 것 같이', 하나님은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완고함을 통해서도 그 분의 뜻을 이뤄가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에베소 회당의 완고한 자들 때문에, 에베소에서 생겨난 제자들이 두란노에서 2년에 걸쳐 집중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완고함 자체가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완고함으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은, 자신이 파라오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요, 그 끝은 멸망일 뿐입니다. 완고함으로 사용되는 진노의 그릇이 아니라, 긍휼함을 전하는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체류한 이 2년동안 고린도전서를 썼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타이밍을 재다가 고린도전서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아, 그 전에 에베소에서 있었던 큰 사건을 빼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에베소에서 있었던 큰 사건'을 살펴본 뒤, 이제 고린도전서를 본격적으로 탐독해봅시다.



WRITTEN BY
파다고기

,



사도행전 18:19~28


  바울은 그리스도인들과 며칠을 더 머물다가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데리고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 그는 서원이 있어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 에베소에 도착하자 바울은 그 부부를 그 곳에 두고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과 논쟁했다.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좀더 오래 머물라고 청했지만 작별 인사를 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여러분에게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지도를 봐야할겁니다. 지도를 보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잘 들어오질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반드시 지도를 옆에 같이 펴놓고 봐야하는 책입니다. 바울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세 사람은 '아카이아 지방의 고린도'에 있었고, 고린도 동쪽의 겐그레아 항구에서 머리를 민 바울은, 그들과 함께 에베소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이 곳 에베소에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남겨둡니다. 이 사람들을 에베소에 남겨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에베소가 이른바 3차 선교여행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에베소를 떠나서 가이사랴로 갔다. 그 다음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 교회에 문안하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얼마간 지낸 후에 그는 다시 떠나서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지방을 두루 다니며 모든 제자를 격려했다.

  부부를 남겨놓은 뒤 바울은 홀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가로질러 가이사랴로 이동합니다. 가이사랴에서 조금만 더 가면 '그 교회'가 있습니다. 누가가 '그 교회'라 부르는 교회는 바로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갈 때는 언제나 '올라간다'는 표현을 씁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를 방문한 바울은 다시 안디옥으로 갑니다. 그 곳에서 얼마 지난 후에 갈라디아와 부르기아를 두루 다니며(지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1차 전도여행 때 세웠던 공동체들을 돌아봅니다.

  아볼로라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도착했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었다. 그는 언변이 좋고 성경 해석에 능했다. 그는 주의 도에 대해 배운 바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숨결 안에서 열심내는 사람이었고,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했지만 예수에 대해서 정확하게 가르쳤다. 그는 회당에서 담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의 말을 듣고 한쪽으로 데려가서 하나님의 도에 대해 더 정확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누가는 아볼로라는 새로운 인물을 소개합니다. 이 인물이 에베소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에베소에는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가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이들은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있었던 학문의 도시입니다.(물론 그 책의 대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지만 말입니다) 그 곳 출신인 아볼로는 학식있는 사람이었고, 게다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의 도'에 대해서 배운바가 있었다고 누가는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배운 주의 도는 요한으로부터 배운 것이었습니다. 즉 메시아가 오실 것이고, 그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세례를 받자는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요한이 말한 메시아, 예수에 대해서도 아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봐왔던 구약성경으로, 왜 메시아 예수이신지를 요령있게, 열정적으로 설명해나갔습니다. 여기서 열정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열심을 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가르침을 듣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한쪽으로 데려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무슨 얘기를 해준 것일까요? 짐작컨데, 아마도 아볼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구약을 통해서 가르칠 수는 있었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사도행전에서 이 아볼로에 대한 소개 이후 나오는 내용이,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던 요한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볼로는 예수가 주라는 사실을 회당에서 담대하게 전했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그는 성령 안에서 말씀을 풀어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아카이아로 건너가고 싶어 했다.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격려차 아카이아에 있는 예수 공동체에 그를 환영해주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곳에 도착한 아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신실한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메시아는 정말로 예수였다는 것을 성경을 가지고 입증하여 공개적으로 강력하게 유대인들을 반박했기 때문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부터 성령에 대해 전해들은 아볼로는 아카이아로 건너가고자 했습니다. 아카이아는 바울과 블리스길라 아굴라 일행이 얼마 전 건너온 곳이고, 고린도 공동체가 있는 지역입니다. 아마도 성경에 대해 분명한 지식이 있는 아볼로에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고린도 공동체를 도와줄 것을 부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아볼로는 떠납니다. 그리고 에베소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아마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에베소 지역에서 공동체를 이뤘나봅니다)은 아카이아에 있는 공동체에게 아볼로를 환영해주라는 편지를 보냅니다.

  아볼로는 그 곳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신실한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 점이 고린도전서에도 언급됩니다. 물론 그의 영향력이 고린도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됩니다만, 이것은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고 두부 자르듯이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볼로의 영향력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분열의 기회로 사용하는 누군가들이 있을 뿐입니다.

  어찌되었든 아볼로라는 이름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회당에서 메시아가 예수라는 사실을 전하던 아볼로가, 이제 성령으로 교제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로 마침내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아볼로가 고린도 공동체에서 사역하는 동안, 바울이 지중해를 한바퀴 돌아서 다시 에베소로 돌아옵니다. 



WRITTEN BY
파다고기

,

  고린도에 대한 내용을 다루기 시작하자마자, 이제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1년 6개월에 걸쳐 고린도에 있었다는 언급이 있었을 뿐, 사도행전에서는 고린도에서 있었던 자세한 일들을 알기 어렵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린도전서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 다른 두 책을 번갈아보며, 당시 사건을 재구성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18:12~18입니다. 각자의 성경을 가지고 먼저 본문을 읽어보는게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갈리오라는 사람과 아가야라는 지명으로 시작합니다. 모르는 지역에서 있었던, 모르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시작부터 지루할테니, 일단 갈리오가 누구이며, 아가야가 어디인지부터 알아봅시다. 사실 갈리오보다는 그 형이 더 유명합니다. 갈리오는 스토아 철학자로 유명한 세네카의 동생입니다. 소크라테스와 같이 자신의 죽음을 떳떳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유명하지요. 세네카는 네로 황제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그 동생인 갈리오는 아가야 지방의 총독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갈리오가 언급되는 이 본문은 성경과 역사책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갈리오가 총독을 지낸 것이, A.D.51~52였으니, 우리는 바울의 일대기도 역사의 어느 시점인지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아가야는 오늘날 그리스 지역입니다. 아래 지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지도에서 아굴라의 고향인 '본도'를 확인해봅시다. 그리고 '고린도'도 찍어보시고요. '아가야'도 찾아봅시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역 안에 속한 도시 이름입니다. 즉 아가야의 총독은 고린도의 일도 관할합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으로 있을 때, 즉 A.D.51~52 어느 날에,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던 바울을 유대인들이 붙잡아 갈리오에게 끌고 왔습니다. 그를 끌고 온 이유가 13절입니다.

사도행전 18:13
"이 사람은 사람들에게 불법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가르칩니다" 라고 그들이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저 '불법적인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가르쳤기에, 유대인들은 바울의 방법을 '불법'이라 생각했던 것일까요? 아마도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법적인 방법'이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만으로 예배의 자격을 제한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토라(그들은 '법'이라 불렀습니다)에 합당한 방식이라 생각했습니다. 즉 토라는 자신들의 지위를 지켜주는 하나님의 법이었고, 이 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공동체는 토라를 이루는 방식이 할례에 있지 않고 신실함에 있으며, 따라서 할례를 받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 신실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예수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 이 점을 가리켜 유대인들은 '불법적인 방법'이라 말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이들은, 이 '예수를 통한 하나됨'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갈리오가 보기에는, 유대인들의 이 기소내용은 별로 문제가 되거나 위험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시다.

사도행전 18:14,15
바울이 말을 하려고 하는데 갈리오가 개입했다.
"유대인들이여, 보시오. 이것이 심각한 범법 행위나 위험한 학행의 문제라면 내가 여러분의 탄원을 제대로 받아들이겠소. 그러나 이것이 여러분의 관습에 속한 말과 이름과 율법에 대한 논쟁이라면 여러분끼리 해결하시오. 이런 문제에 내가 재판관 노릇을 할 생각은 없소."

  갈리오는 유대인들과 예수 공동체의 일이 그저 특정 지방의 종교에 국한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율법에 호소할 일이라면 율법에 따라 해결할 일이지, 로마의 총독인 자신의 일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마의 총독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폭동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팍스 로마나를 유지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즉 황제 중심으로 전세계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이 로마의 목적이었습니다. 점령지역에서 벌어지는 소요는 그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의 입지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빌라도가 예수의 처형에 눈감아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예수 공동체를 불법으로 규정한 유대인의 생각은 토라를 통해 비춰보아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그의 편지들에게 밝히 드러낼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 공동체는 사회의 암적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은 '사랑'이었고, 말리기는 커녕 칭찬해줘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리오의 이러한 판단은, 이 아가야 지역에서 예수 공동체가 불법이 아니라는 판례로 남게 되었고, 앞으로의 선교에 더욱 힘을 실어줄 것입니다.



  바울을 기소한 유대인들은 이렇게 갈리오 앞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자 유대인 무리들이 새로운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 재판정 앞에서 마구 팼습니다.(소스데네 전에는 그리스보가 회당장이었으나, 그는 어제 본문에서 주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새로이 회당장이 된 소스데네가 사람들을 선동했을 것이고, 갈리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유대인들이 분에 못이겨, 자신들의 지도자에게 책임지라며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갈리오는 유대인들이 서로 분열하며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저 지켜만 봤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잘못 판단하고 있다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까지 읽고서, 소스데네가 무척이나 불쌍해졌습니다. 회당 식구들에게 얻어맞은 회당장이라니요. 그런데 이 얻어맞음이 그에게 복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소스데네는 회당장의 직위를 버리고,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바울과 함께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첫머리에 언급되는 영광을 누리며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1
하나님의 뜻에 따라 왕이신 예수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과 우리 형제 소스데네가...

  갈리오의 재판이 끝난뒤, 바울은 며칠있다가 고린도를 떠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떠납니다. 이 때 소스데네가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보아, 소스데네가 이 때 합류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이제 이 천막쟁이들은 배를 타고 시리아로 떠납니다. 아래 지도를 봅시다.

  바울은 고린도 동쪽 끝에 있는 겐그레아 항구에서 머리를 깎습니다.(겐그레아는 '뵈뵈'라는 여자가 살고 있는데, 나중에 바울은 이 여자에게 <로마서>를 그녀의 손에 맡깁니다.) 18:18에 보면 "그가 서원한 것이 있어" 머리를 깎았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무언가 중요한 임무에 임할 때, 머리를 깎지 않고 내버려둡니다. 나실인 규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규정 중에 머리를 깎지 않는 것이 있었거든요.(삼손도 나실인이었습니다. )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보낸 1년 6개월간 고린도에서 사역하면서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 있었고, 그 약속을 잘 지켰기에 그간 머리를 자르지 않다가, 이제 고린도를 떠나면서 머리를 자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새로운 지역 '에베소'로 떠납니다. 우리도 일단 바울을 따라서 좀 더 다녀봅니다. 고린도는 떠났지만, 아직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등장인물 소개가 덜 끝났습니다.



  생각할 거리들을 좀 만들어봤습니다.

*유대인처럼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해코지한 적이 있습니까?

*소스데네와 같은 경우를 겪은 적은 없습니까? 나에게 끔찍한 불행이 닥쳤다고 생각했으나, 후에 이 일 때문에 안도의 한 숨을 내쉰 경우 말입니다.

*역사와 성경이 연결되는 지점을 어찌 보셨습니까? 성경을 종교에 국한한 책으로 보는 것의 문제점을 생각해봅시다.





'[경전씹기 질겅질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19:23~41  (3) 2015.09.09
사도행전 19:11~22  (2) 2015.09.06
사도행전 18:1~11  (2) 2015.08.31
목적 그 자체인 것에 대해  (0) 2015.06.30
[경전읽기 질겅질겅] 4. 나의 케이트 윈슬렛  (1) 2015.05.30

WRITTEN BY
파다고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