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에띠'라는 가상의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였습니다.
에띠 보아.
에띠! 삶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나는 이런 철없는 생각들을 종일 하곤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라는 것은 과연 있을까. 있다면 어찌 드러낼 수 있을까. 오늘 우리네 삶이 '현시창'이라는 데에는 모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왜 우리는 이것을 해결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진 않는걸까? 이러한 질문들은 20대 때에 하던 것인데, 33살이 된 오늘도 여전해. 세상에 대해 묻는 질문들은 언제나 '난 어찌 살아야하지?' 로 귀결되어버려. 내가 어찌 살까를 물으면, 난 또 혼자서 '난 누구지?'를 나에게 되묻고 있어. 가끔은 이런 내가 바보처럼 느껴져.
에티오피아는 어때? 널 보려고 한 번은 꼭 가려고 했는데, 너희 나라는 여행경보 1단계더라. 기독교 유적이 많은 곳이라 꼭 한 번 가보고 싶은데 말이야. 혹시 내가 너희 나라에 갈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까? 여기든 거기든 현시창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의 인간성을 압박받는 건,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 여기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그렇다고 인간성에 대한 압박이 없는게 아니거든. 몸이 편하면 정신이 피곤하고, 정신이 편하면 몸이 피곤해. 왜 서로를 피곤하게 하는걸까? 왜 인간은 이 피곤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까? 이게 혹시 다 간 때문에?
에띠! 난 경전을 꺼내들었어. 같은 문제로 고민했던 사람들이 써놓은 글을 보면,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책이 귀했던 그 옛날, 꼭 써두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글자들이라면,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피 흘렸던 글자들이라면, 나에게 무언가 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 그래서 내가 오랜 책들을 읽고 마음에 새긴 것들을 너에게 말하려고 해. 그런데 이런 말을 적고 있는데, 불현듯 나는 어쩌면 경전을 들여다 보기 전에 답을 이미 얻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왜냐하면 나는 들여다보고 나에게 읽혀진 대로 받아들이겠다고 작정하고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 것이니까. 받아들이겠다고 작정한 것을 '믿음'이라 부를 수 있다면, 나는 그 글자들이 보여주지도 않은 의미들을 먼저 믿어버리고, 그 다음 들여다보기 시작한거야. 이상하지 않아?
이것 저것 보고 생각해서, 나에게 뚜렷해진 것이 있어. 그런데 그것은 사실 이미 내 속에서 뚜렷했기에, 내 눈에도 뚜렷하게 보인걸거야. 내 속에서 뚜렷한 것이, 네 속에서도 뚜렷할 것이라 바라는 것은 허튼 기대일까? 여기와 에티오피아는 거리가 멀지만, 그럼에도 같은 것을 너와 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말이야. 그것을 '인간다움'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에띠! 내 속에 있는 게, 네 속에서도 일어나면 너무 좋겠어! 그래서 난 이 글을 써.
1. 한 처음
무엇부터 하면 좋을까? 그래 '시작'부터 해보자. 무언가를 뚜렷이 드러내려면, 그 시작을 분명히 해야해. 시작을 알고자 함은 '역사'야. history라는 말은 본래 '탐문'이란 뜻이 있다 하더라. 탐문은 현재를 만든 과거에 대한 추적이니, 역사를 생각하는 인간은 현실을 설명해줄 근원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있어. 과정을 더듬어 '근원'에, '시작'에, '첫'에 닿고 싶은거야.
하지만 역사의 한계도 분명해. 역사는 그 근원을 속 시원하게 말해줄 수가 없어. 이건 학문의 한계이기도 해. 보이는 것을 근거로 삼아 과거를 추적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는 눈에서 멀어지고 있어. 생각해보면, '지금'을 뺀 다른 시간의 지평은 모두 보이지 않는 차원이야. 우리는 과거의 시작도, 미래의 끝도 볼 수 없어.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처지야. 그게 인간일까. 보이지 않는 것에서 의미를 얻어다가, 보이는 것을 규정할 수 밖에 없는 존재. 우리는 이것을 '삶'이라 부르잖아.
다행스럽게도, 시간의 더미에 묻혀버린 그 '시작'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바로 과학자들이야.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그런 의미에서 과학자라고 생각해. 그들은 그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은 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지. 바로 물질이야. 그래서 물질을 연구하고, 또 그 물질 사이의 질서를 더듬어가며 그 시작을 재구성해. 그래서 그들이 내놓은 이야기를 너도 알거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 한 점에서부터 폭발되듯 생성되었고, 그 첫 폭발에서부터 모든 생명들이 탄생할 수 있는 초기조건이 구성되었다는 이야기. 그래, 빅뱅! 일본말로는 비꾸방구!
얘네 말구
보이지 않는 그 시작을 말하는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 바로 종교인들이야. 그래서 종교와 과학은 이 시작을 놓고서 서로 대립해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그렇다고 섯부르게 어느 한 쪽만 옳다고 생각하진 마. 종교인들은 물질을 연구하는 과학자와는 달리 종교인은 비물질(이런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어. 영혼, 인격, 정신, 이데아, 어찌 표현하면 좋을까)을 연구할 뿐이야. 비물질은 말그대로 물질이 아니라서, 이름붙이기 애매해. 그래서 가끔 종교인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발생한다구. 같은 것을 다르게 이름 붙였기 때문에 싸우는 것을 뺀버린다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 것들을 많이 좁혀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여간 종교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 아닌 것이, 물질과 마찬가지로, 시작부터 흘러 내려왔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야. 그리고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기록하고자 한 것이 다름 아닌 경전이야. 눈에 보이는 글자로 써놓으려니,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어? 그래서 경전은 읽기도 어렵고, 물질만 이야기하는 오늘날은 더더욱 이해하기가 어려워.
노자라는 사람의 글을 볼래? 아래는 한땀한땀 나의 발로 해 본 번역.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옳다는 길이 항상 길이 아니듯,
옳다는 이름이 항상 옳은 이름 아니다.
이름 없음에서 우주가 창조되었고,
이름하야 만물의 어머니라 하더라.
고로 항상 멈춰있어 그 기묘함을 꿰뚫어보고,
항상 움직이며 그 돌아감을 꿰뚫어보니,
이 멈춤과 움직임은 한 가지에서 나왔으나,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함께 말하자면, '아득히 검고 검음',
그 오묘함이 (드나드는) 문이다.
에띠! 대체 노자는 무엇을 본 것일까? 이름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이름 없는 것이 있대. 심지어 사람들이 옳다고 이름 붙인 것도 다 옳은 것이 아니고,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옳음이 있다는거야. 그리고 이름 있는 것이든, 이름 없는 것이든, 다 한 근원에서 기원했다는거야.
세상이 이름 붙은 것과 이름 붙지 않은 것. 이렇게 두 차원으로 이뤄졌다는 이 노인네의 생각에 대해서 어찌 생각해? 아마 그도 살면서 이름 붙은 것을 겪고, 또한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를 겪었으니까, 이렇게 써놓은 것 아니겠어? 사람은 이름 붙은 것을 더 좋아하고 옳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잊어선 안되기 때문에, 저런 글을 남긴 것 아니겠어?
저 글을 읽는데, 나는 이런 동양화 그림이 생각났어. 이 그림을 보면, 난초가 눈에 확 들어오지만, 사실 이 그림에는 난초만 있지 않아. 그래, 여백도 있지. 여백이 있고, 그 속에 난초가 있어서, 이 둘이 '하나의 그림'을 이뤄. 그럼 이 여백과 난초의 근원은 무엇일까? 저 구석에 쓰인 글자가 보여주는 사람이겠지. 세상은 이름 없는 여백과 이름 있는 난초로 이루어졌어. 그리고 이 두 가지의 근원을 가르쳐주는 저 낙관이 경전이라 생각해. 그리고 저 이름의 주인공은, 저 완성된 그림보다 커. 내가 무슨 말하고 싶은지 알겠어?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을 물질이라 부르고, 붙일 수 없는 것을 정신이라 불러보자. 물질과 정신이 하나되어 하나의 사람을 이루고, 하나의 세상을 이뤄. 흔히들 이원론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배격하자고도 말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두 차원으로 생겨 먹었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생각이었어. 우리도 늘 겪고 있잖아. 미술 입시학원에서 가르치는 "발상과 표현"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차원과 보이는 차원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야. 이 두 차원을 하늘과 땅이라 부르던, 이데아와 현상계라 부르던, 형상과 질료라 부르던, 아니면 과학과 종교라 부르던! 모두 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임을 기억해야 해. 모두가 큰 여백에 그려진 그림들이라면,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어. 그리고 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기원을 생각해봐.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물질만의 시작이어도 안되고, 정신만의 시작이어도 안돼. 그리고 정신과 물질이 시작된 '한 처음'은, 정신과 물질의 합보다 커야 해. 저 그림보다 그림을 그린 이가 더 복잡하고, 고도의 존재인 것처럼 말이야.
사람은 죽어가고, 또 죽는데도, 사람의 죽음과 상관없이 계속 이어져 내려온 두 개의 근거가 있어. 정신과 물질이야. 정신과 물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내 정신은 종교고, 내 몸은 과학이야.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을 경전이 밝히고, 눈에 보이는 차원을 실험이 밝혀. 이 둘은 하나라서 떨어질수가 없어. 나는 생각하면서 움직여. 이 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거야? <마의 산>이라는 소설에 보니, 세계가 두 가지 차원으로 이뤄졌다는 신부와, 한 차원 뿐이라는 인문학자가 계속 싸우고 논쟁하더라. 물질과 정신 중에 어느게 더 중요한지, 요새도 싸우기는 마찬가지야. 다 밥줄이 걸린 싸움이라 이리도 치열한 것일테지. 그런데 일단 내 밥줄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정말 시작이 무엇인지, 모든 사람이 납득할만한 처음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본다면, 우리는 이 두 가지 차원을 보두 생각해야 해.
마치 작곡가가 써내려간 노래라면 어때? 그 속에는 성대를 울리는 음표 있고, 소리를 내지 말아야하는 쉼표도 있어. 음표와 쉼표가 서로 비중을 놓고 싸우면 노래를 망쳐. 그러니 작곡자를 찾아가야 해! 음표와 쉼표를 만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낳은, 그 만물의 어머니를 만나자. 거기가 처음이야. 거기가 시작이야. 음표만 말하려는 무신론자와, 쉼표만 말하려는 종교인이 함께 어울려 사는게 우리 네 세상인데, 그 양쪽이 함께 생각해야할 '첫'이란, 눈에 보이는 것만도, 혹은 보이지 않는 것만도 아니라는 확신이야! 그것을 낸 존재. 음표와 쉼표가 흘러나온 그 한 처음,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원이라 할만한 그것이 우리 모두의 처음이어야 해. 그래야 너도 근원적이고, 나도 근원적이야. 우리는 같은 데서 나왔어. 쓰면서도 '이것 참 말로 하기 어렵네'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걸 다섯 들자로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다면 믿을테야?
一始無始一
단군시대때부터 내려왔다고 알려진 <천부경>이라는 경전이야. 위작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다섯글자만으로 애송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위의 구절은 "하나가 있는데, 그 하나란, 모든 것을 비롯되게 하면서도, 비롯된 적이 없는 하나" 라고 풀 수 있어. 이름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비롯되었던 그 노자의 그 문이, 바로 이 '하나(一)'라 생각해. 두 차원으로 이뤄진 이 세계의 참 근원. 그 근원이란 정말 시작이 없어야 하지. 근원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있다면 그 근원을 근원이라 부르면 안될테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도 같은 말이야. 모든 것을 움직이나, 정작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 그 하나. 만일 이 세계를 <성경>에서 처럼 '하늘'과 '땅'의 두 차원으로 적어 본다면, 우리가 지금 말하는 그 하나란, 결코 하늘일 수 없어. 하늘보다 높은 하나고, 하늘을 만든 하나지. "하늘 꼭대기의 하나"라는 표현이 좋을까? 그 하나는 정신만도 아니고, 물질만도 아니야. 오히려 그 두 가지가 비롯된 하나야. 그 하나를 창조의 하나라 부르던, 진화의 하나라 부르던 나는 개의치 않을래. 그 하나를 기억하느냐, 잊었느냐가 중요해. 기억해봐, 에띠! 우리 모두가 시작되었던 그 근원이야!
만일 그러한 하나가 있다면,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은 분명히 하나되어야 할 명분이 있어. 같은 어미 배에서 나온 한 형제이기 때문이야! 본래 한 민족이었던 남과 북이기 때문이야! 허나 그러한 하나가 없다면, 이 세계는 하나됨 없이 끝없이 분열될 뿐이야. 대화를 계속 이어갈 수록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슬픔을 알고 있어? 하나를 잊으면 우리는 마주 하는 모든 존재와 평행선이 될 뿐이야.
보이지 않는 차원과 보이는 차원이 하나되는 것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지행합일"이겠지. "작심삼일"이라는 말에도 두 차원이 들어있어. '작심'이라는 보이지 않는 차원과 '삼일'이라는 눈에 보이는 몸적 차원이. 이 두 차원이 하나되어야 함은 누구나 알아. 우리가 하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이 하나에 대한 느낌이 있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으면서도, 우리는 그 하나됨을 갈망하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지 않아? 그 하나에 대한 앎은 칸트의 말대로 정말 경험해보지도 않고서 알 수 있는 '선험적 지식'이야. 우리가 찾는 인간다움이란, 바로 그 하나에 있어. 정신과 물질의 조화, 생각과 몸생활의 하나됨, 옳은 생각이 참으로 이뤄짐.
에띠, 상상해봐. 이 하나됨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다면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곧 두 가지 차원의 하나됨이고, 이것을 세계적 차원으로 보면, 모든 분열과 전쟁의 끝이며, 우주적 차원으로 보면 보이지 않는 차원과, 보이는 차원의 하나됨이야. <성경>의 표현을 빌려쓰자면, 하늘에서 이룬 것이 땅에서도 이뤄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고, 모두가 하늘과 땅을 비롯되게 한 하나. 물질과 비물질이 시작된 하나. 일시무시일의 하나로 돌아감이야.
이 하나를 가리켜,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나는 이어지는 글에서, 이 하나에 나의 존경의 의미를 담아 '님'자를 붙여 부르고자 해.
땅 위에 난지 11671일에
파다고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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