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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모든 것은 텍스트다. 텍스트라함은 1) 해석을 요구하는 2) 질서잡힌 무언가를 뜻하는 말이다. 지금 이 글이 그렇다. 문법이라는 질서아래 단어들이 놓이고, 이 글은 지금 당신의 해석과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의 육체도 그렇다. 지넘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육체가 두 개의 나선 위에 수놓인 정보들의 집합임을 보지 않았는가. 질서잡힌 정보들의 이해를 통해 우리는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몸만 그러한가? 모든 물질이, 혹은 비물질이, 그리고 우주 전체가 텍스트다. 우주는 신묘한 질서를 가지고, 사람에게 읽기를 요구하고 있다. 과학 마저도 무언가 질서가 있음을 전제하기에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 우주 전체가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텍스트이기에, '읽기'가 있다.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읽는다. 읽을 수 있다 당신처럼 말이다. 무언가 질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질서를 찾고자 서로 다른 것들을 연결하며, 의미를 파고든다. 이질적인 것의 조화를 통해 새로이 질서를 발견한다('새로운 질서'라고 쓰지 않는다. 새로운 질서가 아니라 본래 있던 것이다). 이 '읽는 방식'을 가리켜 세계관이라 부른다. 여럿(세상)과 하나(나) 사이에서 기능하는, 내가 세상을 읽는 방식이다. 세계관을 위장에 비유할 수 있겠다. 우리는 오늘 하루도 이것저것 먹을텐데, 이 이것저것들이 한 위장에서 잘 소화될 때, 우리의 몸과 정신은 그 여럿으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를 보고 듣지만, 그것들을 어찌 읽을지가, 다시 말해 내 정신 속에서 어찌 소화시키는지가, 나의 삶을 (권력들이 드러내는 거짓 질서가 아닌) 참질서 안에 조화롭게 하는 일과 직결될 것이다.
이 세계관은 이야기의 형태로 표현된다. 그래서 나는 나를 둘러싼 텍스트들을 읽을 때마다, 하나의 이야기를 만난다. 이 이야기는 신으로 시작해서 신으로 끝나는 이야기, 그 속에는 우주와 지구, 그리고 이스라엘과 예수를 지나 오늘 내 삶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이야기다. 내가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다 이 이야기 안에서 각기 의미를 찾는다. 이것이 내가 세상을 읽는 방식이다. 성경 내러티브의 세계관. 이 위장이, 다음의 노래 가사에 어찌 기능하는지를 보여주고 싶다. 이승환의 Fall To Fly란 곡인데, 나의 읽기가 당신과 공명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나의 뵘을 드러내고자 한다.
1. '현시대'와 작심삼일
무겁죠 무섭죠
그대 앞에 놓인 현실이
배운 것과 달리
깨우침과 달리
점점 달리 가죠
성경은 두 개의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현시대', 다른 하나는 '오는 시대'다. '현시대'는 진리가 비웃음을 사고, 정의가 짓밟히는 시대다. 현시대의 잔혹함은 창세기 3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 최초의 부부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인류 최초의 장남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다.
정말 이상한 지점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선과 악을 판단하며, 올바른 것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실천에 있어서는 그 올바름이 이뤄지지 않는다. 선과 악을 가르는 지혜를 얻고자 뱀의 말을 들었던 사람은, 오늘도 뱀의 소리를 경청하고 있다. 우리 역시 선과 악을 끊임없이 갈라놓지만, 그것이 정말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음에 뱀의 영향력을 느낀다. 이상하지 않은가? 선과 악을 나눠놓는 사람은 많아도, 구별해놓은 선을 온전히 실천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 말을 이루는 사람은 없다는 '현실'이! 현시대다.
이것은 '작심삼일'이라는 말로도 잘 드러나는데, 무언가 작심을 했다가도 그것을 실천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누구나' 만나게 된다. 누구나라니! 우리가 올바름을 실천할 수 없기에, 지구가, 세계가, 우리의 관계가, 그리고 내가 병들고 있다. 우리에게 실천력이 없다는 이 아픈 현실이 현시대다. 현시대에 만연한 작심삼일의 무력함은, 세계 전체로 번져나가 우리가 문제라 부르는 일들의 주범이, 사실 우리 자신임을 보여준다. 다이나믹 듀오의 <살인자의 몽타쥬>라는 곡에 나오는, 살인자를 붙잡기 위해 몽타쥬를 그리다보니, 그 얼굴이 결국 자기 자신의 얼굴이었다는 그 가사처럼.
그래서 '무거운' 것이다.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진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나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이런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올바름을 배우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종교기관에서 우리는 "이것이 올바른거야"라는 소리를 계속 듣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리를 들어도 올바를 수 없다. 우리는 글자마냥 죄다 누워있지, 그 2차원에서 벗어나 일어날 수가 없다. 깨우침과 달리 가는데, 달리가는 무리 중에는 나도 끼어 있다.
이 작심삼일의 상태를 인간에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 말하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이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봐서는 안된다. 현시대의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 고통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말해선 안된다. 고통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스러운 것은 고통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왜 우리에게 고통이 있는가? 왜 우리는 이 고통을 고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없는가?
작심삼일은 인류의 보편적 상태가 아닌, 인류의 보편적 '실패'다. 우리의 정신과 육체가 따로 놀고 있는 것은 우리가 본래 그래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아는 것을 실천할 수 없어서, 참으로 알지도 못하는 상태. 이것이 성경 이야기가 말하는 죄의 개념이다. 현시대는 이 죄가 만들어낸다. 이승환이 "현실"이라 말한.
알아요 보여요
끝이 없어 주저앉고픈
일만 하는 나와
얻지 못한 나의
고단한 지금들을
여기에 인간의 절망이 보인다. 이 현시대가 끝이 없어보이니, 주저 앉고만 싶다. 그저 정신의 살림살이는 둘쨰치고, 몸은 건사해야겠으니 사회의 부속이 되어 노동만은 이어간다. 그러면서도 올바른 것을 알아도 실천할 수 있는 진정한 나는 얻지 못했기에, 그저 고단하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노동은 올바른 나와 무관하다. 그래서 지친다.
변화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할 때, 인간은 덜 아프려고 한다. 집회를 통해서 정부의 방침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을때, 사람들은 시위 장소에 나오지 않으려고 하듯이 말이다. 아프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시대를 극복할 수 없는가? 우리는 끝도 없이 그저 고단하기만 할 뿐인가? 우리는 정말 참된 우리 자신을 얻을 수 없는가? 문제를 뻔히 알고, 보이는 상황이지만, 우리는 어찌할지 모른다. 이 아픔이 끝이 없다고,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아픔을 피하려고만 한다.
이 끝없음의 절망을 이미 석가가 보았다. 무한한 윤회의 수레바퀴 안에 있는 것은 저주 그 자체다. 그래서 그는 이 끝없는 수레바퀴를 벗어나 무(無)로 돌아가자고 했다. 오늘날 '일'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현시대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노동이 오늘날의 '일'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죽기 전까지 굴려야 하는 수레바퀴. 돈 많은 기업들이 정치 권력들을 움직이는 것을 알아도, 우리는 저 기업들의 물건들을 사야 하며, 저 속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아이러니. 허나 수레바퀴를 떠나는 방식으로는, 수레바퀴를 고칠 수는 없을테고, 저 수레바퀴는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고스란히 남겨지게 될 것이다. 고단함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길은 어디에 있는가? 수레바퀴를 피하지 않으면서도, 이 수레바퀴 속 사람들이 실천력을 얻는 길 말이다. 이 길을 찾기 전까지, 우리의 무거움과 무서움은 여전히 우리의 현실일텐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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