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찌개집알바생이 아니라 스테이크집알바생이다. 아직은 뚜렷하게 보이는 무언가가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생존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나는 고작 아르바이트지만(이것은 나의 생각이 아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라고 해두자.) 서빙을 하면서, 주방에서 청소를 하면서 너무 기쁘고 즐겁다. 내가 기쁘고 즐겁게 서빙을 하면 손님들도 좋아한다. 주방에서 청소를 깨끗이 하면 손님은 식사를 하면서 위생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나의 '섬김'으로 손님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나의 '몸'을 통해 누군가가 감사와 즐거움을 느낀다. 그런데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가 있을까? 보람없이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생각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몸을 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잠시 학업을 중단하고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을 도전하고 있다. 그 친구는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했고, 정말 표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기대, 사회의 시선, 강요된 구조속에서의 '나'가 아니라, 돈이 목적이 되어서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즐기며 행복해하는 것. 친구와 대화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는 '지친 하루'가 떠올랐다.


(윤종신_2014 월간 윤종신 12월호)


이 영상은 '인쿠르트'에서 광고용으로 사용한 것인데, 
원래 뮤비보다 더 공감이 될 것 같아서 공유한다.


  각자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다르겠지만 나는 이것을 '놀이'와 관련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놀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일하는 것은 미덕이고 놀고 쉬는 것은 악덕이라는 가치관 속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일은 신성하고, 인간은 일을 할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 윤리적 가치판단이 일반화되어 있다. 실제로 인간은 일의 대가로 풍요로운 삶을 영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일과 반대되는 놀이 또는 여가는 생산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호이징가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그는 '놀이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고 한다. 

  원래 놀이와 일은 하나였다. 이것은 '문화'라고도 표현되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람이 주체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 땅 가운데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것이 그분의 영광이 되었다. 하지만 아담의 실패로 모든 것이 왜곡됐고, 특별히 우리가 누리고 다스려야할 '땅'이 저주를 받았다. 우리는 더 이상 주체적일 수 없게 되었고, '하늘'과 '땅'이 분화되고 통제가 생겨났다. 자연스럽게 일과 놀이역시 분리되어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수고하고 땀 흘리는 부정적 의미의 '노동'이 시작되었다. '노동'이 더 이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였다. 말 그대로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한 것일 뿐, 그것으로 충만하기는 어려워진 것이다. 노동이 고되고 힘들어질수록 즐거운 유희, 놀이를 더욱 추구하게 되었다. 

  놀이란, 자고 먹는 활동같이 인간의 생존과 관련이 있는 활동과 '일'에 해당되는 활동을 제외한 신체적·정신적 활동의 모든 것을 말한다. 일정한 목적달성을 위하여 고통을 참아가며 제약된 상황 아래 참여하는 활동은 '일'이다. 반면 놀이는 생활상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무목적적 활동으로서 즐거움과 흥겨움을 안겨주는 가장 자유롭게 해방된 인간활동이다.

  따라서 막연한 휴식은 놀이가 아니다. 놀이는 일정한 육체적·정신적인 활동을 전제로 하며, 정서적 공감력과 정신적 만족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또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재미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즐기고자 하는 의지적인 활동이다. 그러므로 놀이는 재미가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공감력이 있어야 하며, 모든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자유스러움과 놀이 주체의 자발적인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놀이 역시 왜곡되어서, 즐거움만을 쫓는 사람들은 놀이로써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피폐해지고 더 음란해지고 있다. 주체적이었던 사람이 죄로 인해 주체적일 수 없던 때부터 모든 것이 망가졌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셨고, 성육신을 통해 주체적일 수 없는 인간이 주체적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체적 존재가 되어 원래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허락하신 '일'과 '놀이'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들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분께 영광을 드려야한다.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 '일'을 해야한다.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은 마지막 날까지 해야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완성을 바라보는 우리는 '일'을 '놀이'처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이나 '놀이'가 목적이 되는 삶이 아니라 수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일 때 가능하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몸'이 있는 한 '일'과 '놀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피조물인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으며, 자연을 사랑하고 아낄 수 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자기의 맡은바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행위가 가져오는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그 안에서 순수한 즐거움을 추구할 때 인간은 가장 아름답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그렇다면 어떠한 '일'을 해도 괜찮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다' 무슨 일을 해도 좋다. 다만 그것이 '악'한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흔하게(적어도 나의 주변에서는 그렇다.)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을 구분짓는다. 하나님의 일은 교회에서의 봉사, 섬김, 헌신, 예배 등 종교생활이라고 할 수 있고 세상의 일은 말 그대로 생업에 종사하기 위해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종교생활을 '열심히'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사람' 혹은 '은혜받은 자'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반대로, 자기 직업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표식을 은연중에 붙여준다.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라는 표어 아래 이루어진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이란 무엇일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 땅 가운데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떠한 '일'을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다만 그것이 예배를 드리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면 안된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한다고 한다. 그리고 각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과 '사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짜인가는 생각해봐야한다.

  비전, 소명, 사명이라고 말하는 직업은 대부분 의사, 변호사, 검사, 선생님, 목사, 선교사, 고위직 공무원, 대기업 입사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되고 싶어 하는 직업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택시 운전기사, 음식점, 환경미화원, 농업, 기계 수리공 등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은 직업이 있고 그 직업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만 그런 직업을(사회적 위치가 낮고, 연봉이 적고, 영향력이 없는 직업) 비전과 소명, 혹은 사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다.(내가 아직 오래 안살아서 그럴것이다.) 과연 누군가가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그러한 것일까?(모두 부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

  라고 말한다. 가장 사소하게 생각될 수 있는, 그렇지만 사소하지 않은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일'을 함에도 마찬가지다. 나의 '노동'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그것은 힘겹고 지겨운 하루하루를 지쳐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몸'을 씀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막힌 '땅'과 '하늘'을 여신 것처럼 우리 역시 '땅'과 '하늘'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해야한다. 그리고 이것은 '생명'으로 이어진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일'을 즐기며,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로 사람을 세우고 살릴 수도 있다. 또 다른 사람은 봉사를 통해 어렵게 살아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이 살아가게끔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 안에 예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 아니다. 결국 '자기 만족' 혹은 '자아 실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살아가게끔 일하신다.(이것을 일반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를 통해 새로운 몸을 입은 사람들이 하는 '일'은 '생명'이요 '충만'이다. 똑같은 '일'을 하지만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바울은 또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 성실하게 하십시오."

  성실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정직함으로 감당하는 가운데 기쁨과 감사가 생긴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 하는 '일'이며, 나는 하나님 나라에 '일꾼'인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할 수록 하나님 나라는 더욱 확장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

노래에 반복되는 구절이 있다.


비교하지마 상관하지마 누가 그게 옳은 길이래

옳은 길 따위는 없는 걸 내가 걷는 이곳이 나의 길


  내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부끄러워 하지 말자! 또 누가 상관한다고 해서 거기에 힘겨워 하지 말자! 어느 직업이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은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이 충만하도록'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부르심이다.

  이 글을 마치고 나는 다시 알바생이 되러 간다. 그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나 즐겁고 값진 시간이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한 식당을 갔는데 그곳의 대부분의 종업원들은 오랫동안 그곳에서 일하신 할아버지들이 많이 계셨다. 그들은 자기의 일을 너무나 즐거워했고 자부심을 가지고 했다. 나도 물론 서빙을 하면서 즐겁고 행복하다. 그렇지만 이것을 평생은 못할 것 같다. 한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는 내가 평생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충만하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싶은 마음이다! 


WRITTEN BY
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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