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착한 그대 : 고난받는 씨알
착한 그댄 실패들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없어요
곱이곱이 시련마다
선택의 지혜가 쌓이죠
착한 그대들이란 '씨알'이다. 이들은 눈에 뚜렷이 드러나는 '빛남'이나, 다른 사람들의 노동력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힘'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함석헌은 <뜻으로 보는 한국역사>에서, 역사 선생으로서 이 나라에 대해서 무언가 대단하게 드러내 보일만한 것이 없어서 속상했던 때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럼 이 나라에 정녕 아무 것도 없느냐, 그렇지 않다. 고난받는 씨알이 있고, 이들이 이 나라의 주체다. 함석헌은 이 나라를 '수난의 여왕'이라 부르며, 고난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창조될 것이라는 소망을 붙들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도 비슷한데, 400년이 넘는 포로기 역사 속에서(우리나라가 36년간 식민지 생활했던 것의 12배다)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왔던 것은 포로로 끌려갔던 귀족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포로로 끌고갈 가치도 없어서 그 땅에 버려졌던, '땅의 사람들'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오늘날 유대인들의 뿌리가 되었다. 실패들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살몸에 새겨넣는 '착한 그대들'이다. 이들의 고난 속에서 지혜가 날마다 쌓여감은, 이를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낳기 위해서다.
이 고난의 시대가 앞에서 말한 '현시대'다. 이 시대가 그런 시대다. 착한 그대들이 고난받을 수 밖에 없는 시대. 씨알이 말하는 질서와 권력이 말하는 질서는 다른 것 같다. 그렇다면 누가 참 질서 안에 서 있는가?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저들이 질서인가? 아니 씨알은 권력을 넘어선 더 큰 질서(아르케)를 안다. 몸으로 안다. 시련 속에서 소망할 수 있음을, 논문으로 써낼 수는 없어도 마음으로 안다. 이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현시대 속에서 착한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현시대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은 온통 돈과 힘이 이기는 약육강식 뿐인데, 그 속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읽기가 피어난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그리고 바로 고난 받는 씨알의 속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읽기에서부터, 현시대가 아닌 새로운 시대가 피어나고 있다. 이 말은 수사가 아니라는 점을 미리 밝힌다. 새로운 시대가 피어나는 것은 엄연하고, 장엄한 현실이지, 말로 끝낼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는 말이다. 그 이유는,
3. fly는 진실로 확실하다!
fall to fly
어쩌면 이 한 줄 가사를 위해서 이 글을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곡이 상투적인 희망노래로 들리지 않는 것은 저 가사 때문이었다. fall. 이 단어를 기독교 신학에서는 '타락'이라 번역한다. 나는 '곤경'이라 쓰고 싶다. 오늘날 인간이 처한 곤경이 'fall'이다.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진리를 알아도 그 진리대로 살 수 없는 작심삼일의 상태. 욕망에 끌려 중요한 것을 습관적으로 놓치는 상태. 그리고 이 상태가 인류 전체를 감염시켰다는 현실이, 오늘 우리가 처한 곤경의 정체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은데, 저 진리를 알지도 못한다는 곤경이다. 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할 줄도 모르며, 이것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그래서 우리 속에서 진리는 우리의 삶과 '달리' 배우기만 하는 것이 되었다. 줄창 배워도 할 수 없고, 심지어 알 수도 없다는 점이 충격적이지 않은가?
이것을 '악'이라 부르자. 우리는 지금 악의 상태에 빠져(fall)있다. '지정의'의 추락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악에 대해서 물어왔다. 왜 우리는 이러한 상태에 놓여있는가? 왜 우리는 이러한 곤경을 맞게 되었는가? 허나 나는 우리가 왜 fall 되었는지보다 우리가 어찌 fly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왜 악이 존재하는지를 숙고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질문은, '우리는 정말 fly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고난과 곤경을 극복할 수 있을까?'의 물음이다. "'왜' 이 사람이 선천적으로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불행을 겪게 되었습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눈을 뜨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답변을 주셨다. 어? 내 생각이 틀렸다. 예수의 답변은 '어찌 fly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도 아니었다! 나는 곤경을 어찌 해결할지를 얘기하자는 방향으로 글을 쓰고자, 이 생각난 이야기를 인용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 속 진실은, 예수가 최종 목적으로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는 것'이었고,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게 되는 것은 그 최종 목적을 위한 과정으로서 정말 당연한 수순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fly를 정말 믿고 계셨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달리. 의식하지 못한채로, fly를 먼 미래로 밀어놓았던 나와 달리, 그에게 fly는 '지금'이었고, '이제'였다. 고민과 논쟁이 아닌 당장의 실천이었다.
아, 이리도 모른다. fly는 안되니까 고민하는게 아니라, 당연한 거니까 고민하는 것이다. 고민 끝에 답을 내릴 문제가 아니라, 이미 답이 나온 문제다.
그래, 생각을 고쳐먹는다. fly!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fall과 fly를 연결하는 저 'to'는 시간의 흐름을 뜻한다. fall이 시간이 흐르면(to), fly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경우 시간의 흐름을 뜻하는 to는 단단한 'to'다. 반드시 이뤄지는 'to'다. 그래서 목적이나 결과로 해석되는 것이다. 허나 우리, 아니 나의 to는 불안하기만 하다. 'fly'를 신뢰하지 못한다. 실패할 것이라 생각한다. 안될 것이라 지레 겁먹는다. 이것은 현시대의 징후다. 나는 올바른 것을 올곧이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거기에 내 모든 것을 걸지 못하고 주저하면서도, 아파한다. 왜 곤경을 극복하는 것을 fly라는 단어를 써서 표현했을지를 생각해보라. fly라고 해서 이승환이 성층권을 뚫고 날아오르길 바라는 것은 아닐것이다. 만일 fly가 이 대지 위에서 발을 떼고, '이 더러운 세상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개인주의적 도피'이지 착한 그대들이 겪는 곤경에 대한 해결이 될 수 없다. 만일 정녕 그러하다면 고비고비 시련마다 선택의 지혜를 쌓을 필요도 없을테니 말이다. 날아오름은 곤경의 극복이다. 그런데 왜 하필 날아오름이냐. 날아오름은 인간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반대 가치들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언가 가치를 추구해야만 살 수 있다. 그런데 대개 '날아오름'에 반대되는 가치들을 추구한다. 이른바 날아오지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잡는 '땅의 가치'들, 자꾸 땅에 붙어있고 싶은 악한 관성이다. 리차드 포스터가, '돈, 권력, 섹스'라고 말했던 그러한 가치들. 거기에 집착하는 바람에 곤경에 스스로(아주 능동적으로) 빠진다. 혹은 김남준 목사가 말했던 '게으름'. 이 악한 관성은 작심삼일과도 밀접한 상관이 있어서, 결국 인간이 올바른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 fly는 이것으로부터의 자유, 날아오름, 곤경의 극복이다. 발을 땅 위에 단단히 붙인채, 내 발에 붙은 지구와 함께 날아오르는 것이다.
쓰다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날아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땅의 가치 때문이다' 맞는 말이지? 그런데 이 말은 어떤가? '우리가 땅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유는 날아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맞는 말 같다. 소망없는 현시대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양자택일만이 주어졌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땅의 가치 때문에 날아오르지 못한다고 투정부리는 쪽인가, 아니면 날아오르는 건 없으니 땅의 가치를 추구하는 게 현실적이라 생각하는 쪽인가?
가치의 영역에 진공상태는 없어서, 사람에게 아무런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헛된 가치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정말 올바른 가치를 붙잡았다는 뜻이다. 날아오른다는 확신을 얻지 못하면, 저 양자택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어설픈 도덕주의와, 매정한 현실주의 사이에 솟아오르는 길은, 정말 날 수 있다는 확신과 그 확신을 심어주는 탄탄한 근거다. 역사적 근거.
이 말은, 그럼 우리는 정말 곤경이 극복될 것을 신뢰해도 된다는 말인가? fly할 것을 믿고, 오늘 우리의 fall을 바라봐도 된다는 소리인가? 만일 이것이 정말 확실하다면, 우리는 fall한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fly를 자연스럽게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신뢰해도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우리는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한 fly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땅의 가치들에 묶인 정도가 아니라, 땅에 집어삼켜졌다가 다시 fly한 한 사람을 알고 있다! 내 블로그를 자주 왔던 사람들은 알겠지. 그렇다! 예수의 부활이다! 그의 부활은 결국 이 세상의 곤경을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표명이요, 그것이 실제로 이뤄짐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니 'fall한 것들이 반드시 fly할 것임을 믿는다'는 말의 정체는 부활에 대한 신뢰다. 그럼 fall과 fly 사이의 to의 굳건함은 신의 굳건함이 된다. 이런 말이 우습지만, 속고 속이는 사람보다 훨신 믿음직스러운 굳건함이다. fly가 드러났으니, 신의 뜻을 단디 붙잡고, fall을 극복해 나간다. 예수의 말 속에서 볼 수 있던 것처럼 fly는 당연한 것이고(오히려 과정이며), 그 fly를 통해 사람을 사람답게, 세상을 세상답게 하시는 한 분이 드러날 것이다. 이것이 세상 모든 fly의 결말이다. '하나'가 드러날 것이다.
fall to fly. 그래서 나는 이것이 세례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사람과 세상이 새로워질 것을 믿는 이가 세례를 받고 공동체로 들어온다. 그는 가라앉았다가 올라온다. 곤경에 처한 나는 죽고,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fall to fly를 믿고 살겠다는 온 몸을 던진 다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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