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화려한 유혹 속에서 웃고 있지만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해

외로움에 길들여진 후로
차라리 혼자가 마음편한 것을
어쩌면 너는 아직도 이해 못하지
내가 너를 모르는 것처럼

언제나 선택이란 둘 중에 하나
연인 또는 타인뿐인걸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나의 슬픔을
무심하게 바라만 보는 너

처음으로 난 돌아가야겠어
힘든 건 모두가 다를 게 없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뿐이야
약한 모습 보여서 미안해

하지만 언젠가는 돌아올 거야
휴식이란 그런 거니까
내 마음이 넓어지고 자유로워져
너를 다시 만나면 좋을 거야
처음으로 난 돌아가야겠어
힘든 건 모두가 다를 게 없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뿐이야
약한 모습 보여서 미안해

약한 모습 보여서 미안해

 

https://www.youtube.com/watch?v=_TtV4WEJh2w

( 로이킴이 부른 "서울 이곳은". 로이킴의 오리지날 리메이크 음원이 아니라 어쿠스틱 버전이지만, 나는 이게 더 맘에 든다 )

 

 

0.

오랜만에 쓰는데, 뮤지컬이 아닌 드라마라니. 누군가가 '당신은 연재자의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용돈을 스스로 해결하기 시작하면서, 뮤지컬에 도저히 생활비를 쓸 엄두를 못 내고 있기 때문이죠. 는 핑계일수도 있습니다. 프레스콜로 수많은 뮤지컬 영상을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변명은 그만하고,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 보겠습니다.

응답하라 1988이 아니라, 응답하라 1994라니. 시대를 뒤쳐가도 한참 뒤쳐가는 중임은 인정합니다(심지어 수정중인 지금은, 응팔 마저 끝난 상태) 그러나, 한 번 보기 시작하니 자꾸 보고 싶고, 뒷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매우 좋은 작품임도 인정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왜 응답하라 1994를 지금 보느냐가 아니라 왜 오프더레코드를 하면서 까지 응답하라 1994, 특히나 많은 ost중 '서울, 이곳은'를 다루려는가입니다.

 

1.

응답하라 1994는, 그 유명한 응답하라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입니다. 향수를 일으키는 소재를 중심으로 쫄깃한 갈등들이 펼쳐지다보니, 케이블 드라마로써는 이례적으로 꽤 높은 시청률을 매번 찍습니다.

전작 응답하라 1997은 센세이션급으로 우리나라에 향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매우 흥행했던 전작을 뒤로하고 만드는 후속작은 아마 부담감이 컸을 것입니다. 그런 부담감을 안고 응답하라 1994 제작진들이 선택한 메인테마곡은, '서울 이곳은' 이었습니다.

 

 

 

2.

이제 갓 서울에 상경한 삼천포는, 앞으로의 본 거주지가 될 신촌 하숙집을 찾아갑니다.

나정이네 어머니께서 뭐라뭐라 말해주시지만, 서울 지리가 다 거기서 거기일테니, 일단 찾아가보기로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서울역 지하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신촌행 열차는 오지 않고, 애꿎은 청량리행 열차만 계속 들어옵니다.

 

초조해진 삼천포는, 옆 자리에 앉은 아저씨께 '서울사람 다운 온화한 미소'를 건네며, 여쭙기를 시도합니다.

"저.. 저기.. 신촌행 열차는 언제와요?"

당황하신 아저씨에게, 삼천포는 '서울사람다운 나긋나긋한 억양'을 구사하며, 다시 여쭙기를 시도합니다.

"제가 신촌을 갈려고 하는데요.

(눈알을 굴리며) 지금까지 의정부 북부행 열차 세 번, 청량리행 열차 두 번,

의정부행 열차, (한숨을 쉬며) 또 세 번, 청량리행 열차 한↗버언↘..

신촌행 열차는 도대체 언제..

...언제 와요?"

 

아저씨로 부터 신촌행 열차가 따로 없음을, 아무거나 타서 시청역에서 내린 뒤 2호선으로 갈아타야 한다는 정보를 들은 삼천포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전철을 타도 산 넘어 산 입니다.

환승은 왜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서 이루어지는 건지, 택시는 왜 안쪽까지 안들어가는지.. 야속하게도 서울 지하철은, 삼천포에게 어렵기만 합니다.

 

3.

고생 고생 끝에 신촌역까지 다다른 삼천포에게, 또다른 시련이 찾아옵니다. 급한 마음에 일단 아무 출구나 찾아 밖으로 나왔더니, 자신이 찾던 그레이스 백화점을 가려면 아까 나왔던 그 출구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신촌역만 가면 모든게 해결될 줄 알았는데, 난관에 봉착한 삼천포는 갑갑한 마음을 안고 다시 왔던 출구로 되돌아갑니다. 

그 극적인 상황에서 울려퍼지던 음악은 '서울, 이곳은' 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마치 삼천포가 하려던 대사를 대신 해주는 듯, 노래 선곡은 아주 탁월했습니다. 낯선 환경에 이리저리 시달려 지치고, 타지에 홀로 있는 외로움을 제대로 반영해주는 가사와 어쩐지 쓸쓸하게 들리는 멜로디. 거기에 로이킴의 따뜻한 목소리는 금상첨화입니다.

'서울, 이곳은'은 공감을 얻고자 하는 대상이 매우 뚜렷한 노래입니다. 바로 새로운 환경에 초조함을 느끼고 여유를 가지지 못 하는 그러한 사람들이 그것입니다. 노래의 화자는, 계속해서 돌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쩐지 낯선 환경에 패기있게 도전했다가 적응하기를 실패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고백인 것으로 들립니다. 삼천포는 과연 삼천포에서도 초조하게 길을 헤맸을까요? 아니, 오히려 여유롭게 지름길로 갔을 것입니다. 본래 길치가 아닌 삼천포가 어리버리한 길치로 변해버린 것은, 본인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달라진 서울환경 탓에 여유를 잃어버린 까닭입니다.

 

4.

세태의 변화가 빠르고, 뒤쳐지면 도태되는 이 시대에서 이러한 노래는 우리에게 더욱 공감을 줍니다. 가만히 있어도 자고 일어나면 흐름이 바뀌어있는 이 세상에서는, 날로날로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느라 초조함에 휩싸여 여유로움을 찾기란 너무 힘듭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보여서, 내 자신이 너무 부족해서 일어난 일인가 싶어 자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더더욱이 주변인들의 기대를 안고 떠나온 케이스라면, 그 사람들의 기대에 대한 미안함도 더합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절대 본인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삼천포가 길을 잃은 것은 낯선 서울 환경에서 길을 찾느라 여유로움을 잃어버린 까닭입니다. 삼천포가 지하철에 익숙하고 환승에 익숙했다면, 10시간이 아니라 1시간 만에 하숙집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1시간 만에 하숙집에 도착하는 그 날이 오기 위해서는 단 한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너무 빠르게 바뀌어버려 적응하기 힘든, 내가 처한 그 상황을 무조건 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입니다. 삼천포가 서울 지하철에 익숙하기 까지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자신을 이렇게 자괴감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환경임을 인식하고, 그 초조함에서부터 자유로워져 여유를 되찾으려 노력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 '초조함'에서 '여유로움'으로 가기 까지의 과정은 좀 다를 수도 있습니다. 노래의 화자와 삼천포는 둘 다 낯선 서울 살이에 지친 상태로, 같은 상황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러나 둘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노래의 화자는 휴식을 가지고 '내 마음이 넓어지고 여유로워져 너를 다시 만나기'를 선택하였고, 삼천포는 '미우나 고우나 서울에 남아 하숙하기'를 선택하였습니다. (물론 삼천포가 삼천포로 돌아갈지, 서울에 남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였는지 극 중에는 나오지 않지만, 분명히 때려치고 내려가고 싶다는 고민이 들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선택은 이분법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서, 어느 한 쪽이 옳은 결정이라고 말 할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각 선택에 대한 한계점은 분명 존재합니다. 휴식을 가진다 해도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피하려고 했던 그 상황에 다시 마주쳐 같은 어려움에 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남아있기를 선택한다 하여도 돌파하는 과정 가운데에 심신이 지쳐 번아웃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 한계 또한 자신의 선택임을 인식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해도 분명 좋은 경험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상황을 압도하면,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상황은 누리고자 있는 것이지, 휘둘리고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도 우릴 묶을 수는 없고, 인간은 그저 묶이기만 하도록 지어진 존재도 아닙니다. 그러한 상황이 닥칠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와 이 상황이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가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명확하게 알 수록, 우리는 스스로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탓이 아니었구나!'

 

 

p.s. 자꾸 제가 길치인 것에 대한 해명글처럼 보이지만, 그건 절대 아닙니다^_^


WRITTEN BY
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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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기

 이 글은 우연히 불교대학에 다니게 된 한 크리스찬 청년이 쓴 글이다. 글의 바탕은 김복옥 교수님의 ‘불교적 관점에서 본 여성사회’라는 강의에 있다. 나는 그저 이 강의를 정리하며 나의 생각과 느낌을 있는 그대로 적을 뿐이다. 글 연재의 앞서 나에 대해서 소개하면 난 불교대학에 다니지만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이다. 불교에 대에서는 그저 ‘부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가볍게 읽고 자신의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소통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1. 불교란?

 불교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난 불교란 ‘부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강의에선 불교는 ‘행복론’이라고 한다. 삶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고, 행복이란 좋은 느낌 혹은 정서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 강의가 ‘불교이론’을 공부하는 강좌가 아니기에 불교에 대한 정의는 여기까지 다루었다. 하지만 불교를 ‘행복론’이라고 간략하게 요약한 만큼 불교에선 행복을 중요시 하는 것 같았다.


2. 부처의 생애

   사실 이 강의에서 매우 흥미롭게 공부한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다룰 내용이 많지만 이 역시도 ‘불교적 관점’을 배우기 위한 과정이기에 강의에선 간략하게 다루었다. 부처의 생애는 총 8장의 부처가 나온 사진을 통해서 다룰 것이다. 부처의 이름은 싯탈타(고타마 싯다르타)이며 정반왕(‘깨끗한 밥’의 의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반왕의 부인의 이름은 마야이다.

<도솔래의상>

  도솔래의상은 싯달타 태자의 ‘태몽’을 의미하는 그림인다. 저 침상 위의 여자가 마야 부인이며 우측의 하얀 코끼리를 탄 인물은 바로 부처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코끼리는 불교의 시작에서부터 등장하게 되며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주 : 다. 서, '침상'고, '측'만, .


<비람강생상>


  <비람강생상>은 부처가 태어나는 장면이다. (마치 숨은 부처 찾기처럼 부처는 숨어있다. 한 번 찾아보길 권한다.) 부처는 마야 부인의 겨드랑이 아래인 옆구리에 있다. 그렇다 바로 옆구리로 해산하는 장면이다. 왜 이렇게 해산하게 될까? 답은 바로 인도의 계급에 있다. 기원전 1500년 경 아리아인들이 유럽에서 오게 된다.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매우 강력한 철기를 갖고 오게 된다. 그러니 인도 및 여러 나라는 침략당할 수밖에... 철기라는 문명도 갖고 들어와 지배하지만 한편으론 ‘브라만 교’라는 종교를 갖고 들어온다. 결국 기존의 인도의 계급위에 브라만이라는 아리아 인의 계급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이 계급에 해당한는 사람은 존귀하다고 여겨졌고, 태어나는 곳 또한 다르다고 한다. 인도의 계급에 따라 차례로 소개하면, 최사위의 계급 브라만은 머리, 기존 인도의 왕족에 해당하는 크샤트리아는 옆구리, 그 아래 계급인 수드라는 배꼽, 가장 낮은 계급인 바이샤는 발 아래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다시 싯달타로 돌아가면, 싯달타는 태어나고 바로 7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을 말했다고 한다. 그 뜻은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 라는 뜻인데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는 존귀하다.’고 해석한다.

<사문유관상>

  <사문유관상>은 4개의 문으로 나가서 국민의 삶을 봄 이라는 뜻이다. 앞서 말했듯이 싯달타는 태자이다. 즉 왕의 아들이다. 게다가 정반왕의 유일한 아들이여서 향 후 왕위를 위임 받을 핏줄이다. 때문에 항상 좋은 것만 보고 먹고 하였다.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건강해 보인다. (사진의 주황색 옷을 입고 있는 인물) 4개의 문은 동서남북의 문이다. <사문유관상>은 처음으로 동대문을 나갔을 때 ‘노인’을 보게 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바닥의 노인은 보다시피 많이 여위었다. 처음으로 싯달타는 자신의 비해서 상당히 여윈 모습을 보며 옆의 싯달타를 모시는 이한테 물었다. 

‘나도 노인이 되는가?’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노인이 됩니다.’
싯달타는 두려움에 다시 궁궐로 갔다.
그리고 이번엔 남쪽으로 가서 처음 ‘병든 자’를 보게 된다. 그때도 물었다.
‘나도 병에 드나?’
‘그렇습니다. 사람은 병에 들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두려움에 떨었다.
그 후에 이번엔 서쪽으로 갔다. 그곳에선 ‘상여’를 매고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때도 싯달타는
‘왜 사람은 죽는가?’
‘사람은 늙어서 죽습니다.’
‘나도 늙는가?’
‘그렇습니다.’
싯달타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북쪽으로 향한다. 이곳에서는 ‘수행자’를 본다. 이에 싯달타는
‘왜 우리와 다른 옷차림을 하고 있는가?’
‘이들은 수행자여서 그럽니다.’
‘뭘 위해 수행을 하는가?’
‘이들은 늙어서 죽게되는 것에 대해 수행합니다.’
‘나도 수행하면 안 죽을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깨달으면 안 죽습니다.’
이후 싯달타는 궁궐을 떠나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여기서 태자의 고민이 구체화 된다.

‘난 죽지만 죽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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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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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8~25

  십자가의 로고스가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일이지만,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무너뜨리겠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겠다.

  어디에 지혜자가 있습니까? 어디에 문법학자가 있습니까? 어디에 현시대를 대변할 논객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이 코스모스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을 알지 못합니까? 즉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코스모스는 지혜를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케리그마의 어리석음으로 신실한 이들 구원하시기를 좋게 생각하십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찾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의 메시아를 전합니다,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그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메시아는 하나님의 힘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 유명한 본문이 나오기까지 고린도전서의 맥락을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온갖 언변, 지식, 영적 은사로 풍성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분열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에 따라 편을 나누고, 각 편은 저 언변, 지식, 영적 은사를 자신들의 정당성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린도는 말 잘하는 '유명인'을 배출하고, 너도 나도 그렇게 되고자 했던 고린도 도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메시아의 하나됨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됨이란 말로 하나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고린도에 말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지만, 그렇다고 에클레시아가 말을 중심으로 모이는 철학학파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고린도 사람들은 오해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바울이 말로서 전하고자 한 것은 복음이고, 이것은 말로 하는 철학이 아니라, 메시아 십자가의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몬운은 이 '메시아 십자가의 힘'에 대한 상술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지혜'에 관한 것이 아니라 말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음'에 관한 것이며, 말로 구성하는 지혜라기 보다는 힘입니다. 그리고는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암시하는 구절을 인용합니다.

이사야 29:14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내용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던 언약백성 이스라엘은 맹인이 됩니다. 눈이 있어 성경을 보아도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깊이 잠들게 하는 영"(10)을 부어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십니다. 그리고 반전이 14절입니다.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이 등장합니다. 그 일로 인해 지혜자의 지혜가 무색하게 되고, 명철자의 총명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됩니다.

  바울은 이미 다른 편지에서 이사야 29장을 인용한적이 있습니다. 바로 로마서 9장입니다. 저 지혜자와 명철자에 대한 언급 뒤에는 그 유명한 토기장이 비유가 나옵니다. 저는 로마서 9장과 고린도전서 1장이 같은 의식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1) 기이한 일 2) 지혜자들의 지혜가 가려짐 3) 토기장이 비유 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고 흐름이 로마서 9장에도 반영되어 있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고린도전서 1장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에만 등장하는 독특한 사고의 흐름이 아니라, 이미 이사야나 예레미야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8:9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이렇듯 예레미야에서도 2) 멸망당하는 지혜자들이 나오고, 뒤로 넘겨서 18장부터는 3) 토기장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기이한 일에 대해서는 31장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다소 벗어나는 얘기입니다만, 저 주제들에 따라 이사야, 예레미야, 로마서, 고린도전서의 본문을 발췌하고 그 속에서 동일한 사고의 흐름을 찾아보는 접근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왜 세상의 지혜가 멸망당한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왜 이 때마다 토기장이는 등장하는 것일까요? 구약이 예고했고 신약이 이미 벌어졌다고 말하는 기이한 사건이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요?

1) 지혜의 멸망
2) 토기장이 비유의 의미
3) 마침내 벌어진 기이한 일


  앞으로 이 주제들에 따라서 본문을 펼쳐 놓고서 함께 생각해봅시다. 고린도전서를 잠시 떠나서 말입니다. 사실 떠난게 아니죠. 저 얘기가 고린도전서의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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