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띠, 잘 지냈니? 지난 번 '과거의 소망'에 이어 '확인되었다'를 쓰려다가, 저 둘 사이에 꼭 들어가야 할 내용이 생겼어. 과거의 소망이 확인되기 위해서는, 저 둘이 서있는 지평, 즉 이스라엘 서사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야 해. 그런데 '이스라엘 서사'라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벌써 돌부리에 걸린 시대적 속박의 느낌이 있다. '포스트모던의 시절에 서사를 논하다니?!'



1. 가라앉는 거대서사


  우리가 사는 시절을 흔히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른다. 물론 저잣거리 씨알들과는 무관한, 학자들의 용어긴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부르는데는 이유가 있어. 

  모던(근대)과 포스트모던의 경계를 어찌 나눌 수 있을까? 여러 가지 특징이 있겠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중에 하나는 인류를 하나로 묶는 거대서사를 믿느냐, 믿지않느냐가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겠다. 인류는 더이상 삶 전체를 아우르는 큰 이야기를 믿지 않아. 사람들 사이에서 <성경>의 권위가 약해진 것도 이 때문인듯. <성경>은 인류와 우주 그리고 하나님이 등장하는 정말로 거대한 서사를 말하는 책인데, 거대서사에 대한 불신이 시대사조인 요즘의 성경은 그저 판타지, 아니면 민족설화 정도로 읽히고 있어. 


  근대가 무너진 이유는 무엇보다도 양차대전을 얘기할 수 있다. 게르만족이 역사의 정점에서 새로운 지배 계급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거대서사가 인류를 무척이나 괴롭게 했잖아. 신학자들은 히틀러를 지지했고, 철학자들은 역사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실존'에 몰두하기 시작했어. 거대서사는 '신화'라는 이름으로 평가절하되고 역사로 취급을 받지 못했지. 이러한 시대 속에서 성경이 어떠한 취급을 받았을까 생각해봐. 거대서사의 배는 양차대전의 암초 앞에서 침몰하고 있고, 성경은 그 안에 승객처럼 여겨졌어.


  그러나 지금 바다로 가라앉고 있는 저 배의 이름은 사실 거대서사가 아니야. 분명한 이름이 있어. 바로 계몽주의의 서사야. '계몽'이라는 말을 생각해봐. 무지한 사람들을 깨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넘치던 시기가 있었어. 다들 인류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희망에 들떠있었어. 그리고 이 계몽주의의 연장선에 '근대'가 있고. '인류의 발전'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열심히 애쓰던 그 이야기가 무너진거야.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18세기를 역사의 절정으로 봤으나, 그 결과는 전쟁이었고, 인류에게 희망을 줄 것이라는 과학은 원자폭탄을 안겨줬지. 그래서 계몽주의 프로젝트는 처절한 실망감만을 남겨줬어. 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인간성을 지탱하고 있던 희망의 기류들이 모두 신기루처럼 사라졌어. 더이상 인간이 계몽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되어버렸어. 그리고 18세기를 절정으로 가지고 있던, 인류 발전 프로젝트라는 계몽주의의 거대서사는 그 시절부터 불신의 대상이 되어버렸어. 그래서 포스트 모던이야. 


  이것을 대한민국 사회의 386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비추어 생각해보는 것은 비약일까? 우리나라의 급속한 경제발전을 경험했던 우리의 아버지들은, '우리는 그 시절 열심히 살았지'라고 말하잖아. 정말 그들에게는 정말 '우리가 노력하면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어. 마치 18세기의 유럽 사람들처럼 말이야. 그 발전은 경제발전, 부강한 나라, 잘먹고 잘 사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 꿈을 이루는 듯 했어. 그러나 발전은 지속될 수 없었고, 결국 386세대들의 서사는 실패야. 그럼에도 과거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그 시절을 추억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 실패한 서사를 붙잡고서 다음 세대에게 말한다. "너희들은 희망도 열정이 없다고" 그러나 다음 세대는 더이상 386세대들과 같은 희망을 노래할 수 없어. 그래서 이 사회가, 꺽인 희망을 노래했던 자들과, 그 희망을 거부하는 자들로 이 사회는 양분된다.


  계몽주의의 서사가 망조라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아직도 '진보의 신화'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경제 발전의 신화도 마찬가지의 궤적을 가지고 있고. 경제가 발전해서, 우리의 삶이 나아지기를 기대하면서도, 더불어 계속 이 발전이 언제 멈추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지. 아직도 경제 발전의 진보 신화를 믿고 있다면, 더글라스 스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라는 책을 읽어보길 바라. 경제발전의 신화 역시 망할 것이 분명한 서사야. 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는데, 이 서사를 개인의 이야기로 치환해서 생각해봐. '내 인생이 이대로 점점 나아질 거야'라는 헛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장담하는데 점점 나아지지 않을거야. 죽음과 가까워지겠지. 끝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거대서사든, 개인사든, 별로 권장할만한 것은 아니야.


2. <성경>은 그 배에 없어


  그런데 문제는, 계몽주의의 '인류 발전 프로젝트'에 대한 불신이, 모든 류의 거대서사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성경>도 계몽주의와 같은 선상에서 불신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는 거야. 계몽주의 서사가 망조라는 사실을 나도 인정해. 인류가 진보를 거듭하다가, 진정한 희망을 발견하는 일은 결코 없을거야. 이 계몽주의발 '진보의 신화'는 마치 바다에 빠져가는 타이타닉과 같아. 인간 스스로 계몽할 수 있고, 인류와 세계가 발전을 거듭해서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은 폐기 처분 해야 해. 그럼 폐기해버리고, 우리는 전체를 아우르는 그 어떠한 희망 없이, 이야기 없이, 모두가 개체로서 그저 살면 되는 걸까? 모든 것을 해체하자는 포스트모던은 그 자체로 해답인 걸까?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타이타닉 속에서 케이트 윈슬렛을 건져내야 하는 디카프리오가 되고자 해. 우리가 건져내야 할 진정한 거대 서사가 있어.




 

  그런데 기독교인들의 위치선정이 이상해. 계몽주의의 근거없는 희망을 믿는 자들과, 그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로 세계는 양분되었는데, 오늘날 교회의 스탠스는 전자 쪽으로 기운 것 같아. 그러나 계몽주의발 진보의 신화는 망하는 이야기고, 성경과는 전혀 다른 서사야. 인간이 계몽할 수 있고, 세계가 나아질 것이라는 근거없는 희망은, 기독인이 몸담고 있어야 할 배가 아니라는 말이야. 성경은 그 배 안에 없어! 


  그럼 계몽주의 신화와 성경이 어찌 다른지 생각해보자. 일단 <성경>은 과학발전의 18세기를 역사의 절정이라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인간 스스로 계몽할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아. 이 두 가지. 역사의 절정에 대한 다른 이해와, 인간의 능력에 대한 상이한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해. 


  성경이 말하는 역사의 절정이란, 과학 발전의 18세기가 아니라, 먼지 날리는 A.D. 1세기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야. 이 말에 '그럴 줄 알았지'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왜냐하면 이 사건들이 역사의 절정이라는 얘기는, 그 앞에 역사의 발단, 역사의 전개가 있다는 말이고, 이러한 서사의 틀 안에서만이 역사의 절정이 바르게 해석된다는 말이기 때문이야. 즉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성경이 가진 거대 서사안에서 제 의미가 드러나. 십자가와 부활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어. 왜냐하면 그 십자가와 부활을 절정으로 갖는 '그 이야기'를 가지고 십자가와 부활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야. 창조로 시작해서, 부활로 절정을 이루는, 이 거대 서사의 맥락 없이, 파편적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알았다고 오해했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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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글 힘들어하는 에띠,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달을 기대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들을 고민 중이야. 나는 너에게 뭘 해줄 수 있을지 항상 생각해.  

 



WRITTEN BY
파다고기

,

에띠, 안녕.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우리 가족들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중이야. 4월은 정말 더디 가더라.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서 야고보서를 읽던 때가 정말 오래 전 일처럼 느껴져. 늙은 느낌이랄까. <마의 산>에 보면 산 아래보다 산 위의 요양원의 시간이 더디 간다고 하잖아. 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병원은 생명이 시공으로 나타나기도하고, 다시금 사라지기도 하는 기묘한 공간이야.


  저 위의 말을 쓰고 이틀이 지났어. 오늘은 너에게 말하리라.


0.


  아버지 얘기부터 해볼까. 아버지는 요새 산에 자주 다니셔. 아마 엄마 없는 집에 계신 것이 괴로워서 그러신듯해. 하지만 아버지의 잦은 산행은 엄마 때문만은 아니야. 아버지와 대화 중에 세월호 문제에 대한 의견이 서로 완전히 갈렸고, 이 때문에 아버지는 나와 대화하기를 별로 안좋아하셔. 너는 국가 체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길게 글을 쓸 수 있겠지. 





  아냐. 그냥 말나온김에 쭉 얘기해볼까. 아버지의 담론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어. 


1. 정치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닫혀있음


2. 따라서 바뀔 수 없는 일에 대한 대규모 집회는 국가를 불안정하게 만들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음


3. 그럼에도 자꾸 대규모 집회를 하려고 하는 젊은 세대들은 국가의 위태로움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여기서 '종북'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로 떠오른다)


  이런 식의 논리였는데, 대부분의 아버지 또래가 이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대화를 하면서 계속 아버지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해드리기 위해 화법을 조절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대화는 커녕, 서로 선 긋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을거야. 그리고 이것저것 예들을 들어가며, 내 생각을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전하기 위해 애썼어.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독교'에 대한 의견도 아버지와 상이했는데, 나는 저런 생각이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이를 긍정하지 않았어. 그러니 우리는 '기독교'라는 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그에 대해 다른 내용을 채워넣고 있는거야. 


  나는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하나는 '차근차근', 다른 하나는 '의견과 인격의 분리'. 물론 둘 다 엄청나게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차근차근

  누구나 그렇듯, 사람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로 둘러싸여 살고 있잖아. 이런 상황 속에서 타인과의 대화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주 중요한 문제야. 너와 나 역시,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도 바라보는 방식이 많이 달라. 나는 그 '다름'이 왜 나왔는지에 대해서 차근차근 살펴보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저 다른 상태로 내버려두는 것이 '다름을 인정'하는 방식이라면, 그런 방식에는 서로 다른 것이 만나 새로운 것을 창조해나갈 어떠한 접점도 없어. 저 '달리'라는 말이 세계관인데, 결국 대화는 세계관의 차원에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말이야. 서로의 세계관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면, 대화는 피상적인 차원 속에서 끝없는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어. 그러니 차근차근 사건에 대한 다른 이해에서부터 깊이 파들어가 그 차이를 좁혀나가야 해. 이 차이를 좁혀나간다는 말이 참 멋있지 않아? 대화를 통해서 차이를 좁혀나갈 수 있다는 것은, 무언가 하나의 토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해. 하나의 토대! 이 하나의 토대라는 말을 무슨 다양성 말살하는 것처럼 듣는 사람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야. 만일 사람들이 서있는 토대가 각각이라면, 그리고 그 각각의 토대들이 모두 틀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대화할 필요가 없어. 그저 자신이 서있는 토대 위에서 살면 될테니까. 그러나 세월호 사건 때문에 분열된 정국을 보더라도, 각기 다른 토대 위에서 사고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이 서있는 토대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고, 함께 서있어야 할 공통의 '토대'를 형성하기 위해 대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느껴져. 다른 데 아니라, 우리 가족에서부터. 사고할 수 있는 하나의 토대를 찾는 일은, 지금의 분열을 잠재우고 함께 실질적인 고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기초작업이라 생각해. '차근차근'은 대화의 껍질을 벗겨나가면서, 그 토대에 접근하자는 말이야.


-의견의 다름이 인격의 부정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이 과정 속에서, 서로의 토대에 대한 비판은 그 사람 인격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되거나, 혹은 그렇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오해되기 쉬워. 이 점이 정말 답답한 점이기도 해. 누군가의 '토대'를 비판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 누군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야. 그러나 토대를 비판당한 사람은 자신이 그간 살아온 인생을 부정하는 것으로 듣는 것 같아.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 그러나 이 때 서로 기분 나빠할 필요 없어. 그럼 그 비판이 정당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같이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되지 않겠어? 물론 하루 아침에 끝날 일은 아닐거야. 한 달이 걸리던 1년이 걸리던, 두려움 없이 이런 대화들을 계속 해나가야 해. 아버지와도 대화를 이어나갈거야. 그 과정 중에서 나도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 중요한 것은 관철이 아니라, 대화니까. 함께 만들어감이니까, 어쨌거나 문제가 되는 지점들을 찾고, 그 지점들을 면밀하게 검토해보는게 필요해. 때때로 우리는 설익은 개념들을 가지고 서로의 입장차이만 부각하며 싸우는 경우가 많잖아?

  

  지난번 편지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던 말이 있었지.


  예수는 시제를 바꾸었어. 시간을 뒤집었어. 부활할 것이라 말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인격화된 부활이라고 말했어. 예수는 역경을 이겨낸 삶 그 자체야. 곧 부활이야. 먼 머리에나 있었던 그 소망이, 예수를 통해서 마르다의 현재로 돌입한거야. 먼 미래에나 있을 '참 인간다움'의 소망이, 현실에 이뤄진 것이 예수고, 그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은 그 소망을 현재화하게 되는 거야. 이것이 복음이고, 구원이야! 말이 복잡하지만 사실 어렵지 않아. 꿈이 이루어 지는 거야.


  이 내용은 이렇게 문장 몇 개로 처리하고 넘어갈 수 있는게 아니었는데, 내가 정말 불친절했구나. 저 시제를 바꾸었다는 말에 대해서 내가 가진 토대들을 밝혀볼게. 읽어보고 다시 대화해보자. 서로의 토대를 밝히 드러내고. 내용이 너무 장황해지지 않도록, 다음의 문장으로 요약해서 설명하고자 해. 


"과거의 소망이 확인되고 재해석되었다"


  먼저 '과거의 소망'에 대해서는 구약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가진 바람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할거야. 그리고 '확인되고'는 먼 미래에 이뤄질 것이라 생각했던 구약시대 사람들의 소망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이뤄진 이야기를 할거야. 부활에 대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재해석'은 그 이뤄진 소망, 부활 때문에 성경 전체의 의미가 재해석되었다는 것을 짧게 요약해볼거야. 그럼 내가 앞서 말했던 "예수가 시제를 바꾸었다"는 말이 더 구체적으로 들릴 것이라 생각해.


1. 과거의 소망


  생각이 뜬구름 잡는 개똥철학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발바닥을 땅 위에 딱 붙여놓는 것이 중요해. 나는 글을 쓸때면 여러 번 이카루스가 되곤 하는데, 역사적 사료를 뒤지고 찾는 일이 귀찮아서, 그저 머리 속에 추상 개념을 만들어 놓고 이리 저리 굴리고 정리해서 만족하는 경우야. 그런데 그러다가는 추락하고 만다구. 이런 추락에는 날개가 필요한게 아니라, 역사의식이 필요해. 역사적 사건에 단단히 뿌리내린 나무만이 사상의 열매를 맺을 수 있어.


  예수 이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것이 구약성경인데,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이 사람들이 무엇을 소망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 물론 구약성경 뿐만 아니라, 당시 쓰였던 여러 문헌들을 조사해야지. 성경이냐, 아니냐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은 어떠했느냐'야. 역사가가 밝히려는 목적이 여기에 있어. 그리고 당시의 세계관 없이는, 그 당시에 쓰인 글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아마 성경을 읽으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 


  기독교 신학이 오랫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던 주제들이 있었어. 예컨데 우리가 자주쓰는 말인 '구원', '은혜', 천국' 이런 말들은 익숙하지만, 그 의미가 모호한 단어들이야. 그런데 뿌연 안개가 낀것처럼 여러 학자들이 각기 다른 의견들로 갑론을박하던 주제들이, 당시의 세계관 연구를 통해 한 목에 꿰뚫릴 수 있음이 밝혀졌고, 이건 지금도 신학계의 큰 이슈야. 그리고 지난 번 너에게 얘기했던 톰 라이트가 그 중심에 있어. 그의 작업은, 역사로 접근해서(그는 자신을 '역사가'라고 칭하는데) 당시의 세계관을 재구성하고, 그 세계관의 안경으로 텍스트를 다시 읽어내는 작업이야.





  그의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구약 사람들의 세계관을 알 수 있어. 알 수 있다는 말은, 우리가 과거를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야. 다만, 그는 세계관을 '삶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라 설명하고, 다음의 큰 질문들을 제시하고, 저 질문들에 구약 시대의 사람들이 어찌 답할지에 대해 연구했던 거야.


1) 나는 누구인가?

2) 문제는 무엇인가?

3) 해법은 무엇인가?

4) 여기는 어디인가?

5) 지금은 언제인가?


  에띠, 너라면 저 질문에 어찌 대답하겠어? 동시대인들에게 저 질문들은 답없는 숙제와 같은 질문들이야(청소년들에게 저 질문을 많이 던져본 나로서는 그렇게 판단할 수 밖에). 하지만 A.D.1세기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어. 그들은 저 질문들에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었어. 당시 A.D.1세기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지배아래 있었고,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겪었던 출애굽 이야기를 붙잡고 있었어. 만일 타임머신을 타고 2000년전으로 돌아가, 유대인에게 저 질문들을 던져본다면, 아마 이렇게 대답할거야.


1)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2) 문제는 무엇인가?

"지금 하나님의 백성을 폭정으로 다스리고 있는, 제국 로마가 문제입니다."


3) 해법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파라오를 치시고 이스라엘을 건져내셨듯, 우리 민족도 로마로부터 건져낼 것입니다."


4) 여기는 어디인가?

"여기는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지만, 지금은 로마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약속의 땅이 식민지가 되어버렸고, 우리는 여기에서 살고 있습니다."  


5) 지금은 언제인가?

"지금은 가나안 땅을 빼앗기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시절과 같은, '포로기'입니다. 그런데 이 포로기가 끝나면, 의로운 유대인들은 모두 부활할 것이고, 우리는 이 약속의 땅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A.D.1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살았던거야. 위의 내용중에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얘기해줘. 이 글은 아마 계속 피드백을 받아 업데이트를 해야할거야. 지금은 그저 손가락이 가는대로 대강 정리해보는 정도야. 자세한 내용을 내 블로그의 '성서 전체 이야기', '마가가 목격한 역사' 라는 이름으로 써둔 것이 있어. 여하튼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이스라엘은 로마와 무력 대 무력으로 맞붙을 준비를 하고 있었어. 그리고 A.D.70년에 정말 로마와 붙었다가,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없어져버려. 남은 소수의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 (네가 읽었던 서경식씨 책 제목처럼) 디아스포라로서 살게 되고.

  중요한 것은 이들의 소망이야. 당시 이스라엘 안에서도 유혈혁명을 주도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부활'을 믿고 있었는데, 이 부활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야. 특히 당시 유대인들이 자주 애송하던 것은 다니엘서였는데, 그 다니엘서에서는 이 땅을 괴롭게 하는 짐승들을 심판하는 한 사람과, 그 사람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내용이 나오거든.(자세한 내용은 여기) 이 A.D. 1세기 유대인들은 두 가지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자신들의 소망을 표현했어. 하나는 악에 지배당하고 있는 '현시대'.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오셔서 다시 세계를 바로잡으시는 '오는 시대'. 그리고 이 현시대가 끝나면 오는 시대가 찾아오고, 이 시대의 변화를 의로운 사람들의 부활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거야.

  

  이런 유대인들의 생각은 낯선 것만은 아니야. 만일 귀가 막힌 정부를 '악'으로, 그리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 운동가들을 '의인'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이 믿었던 것은 다른게 아니라, 악인 정부를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웠던 이들의 부활이야. 그리고 그들이 부활할 때는, 정말 악이 심판받고 정의가 완성되는,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고, 소망이었던거야. 다만 여기에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악은 로마고, 의인들은 그 로마와 싸우다 죽었던 순교자들을 뜻하는 것이었어.


  그들에게 정의로운 시대, 새로운 시대는 늘 미래의 일이었어. 현실은 늘 포로기로 인식되었지. 이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그들의 갈망이었으나 현실은 늘 그렇듯 녹록치 않았어. 게다가 그들이 맞서는 로마는 정말 강력했는데, 로마는 자신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을 십자가에서 말려죽였어. 그럼에도 부활과 광복의 소망을 믿은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목숨을 던졌지.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의 지식인들은 성경 해석을 통해, 그렇게 죽는 순교자들을 띄우고, 다같이 더 과격하게 움직이자고 사람들을 선동하기도 했어.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임당하던 무수한 랍비들은 하나님이 우리 대신 복수해주실 거라는 로마에 대한 서슬퍼런 유언도 잊지 않았어.

  이상의 내용들에 대해서 함께 이해해볼 것을 권해. 이미 가지고 있는 톰라이트의 <기독교 여행>이란 책도 같은 내용이니 도움이 될 것이고, 나는 어떠한 주제든 너와 대화하기 위해 항상 대기중이야.



  지금 써놓은 것들을 수정 보완하면서, 다음 달에 "2. 확인되었다" 를 마저 써볼게.



WRITTEN BY
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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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띠! 나야. 나는 지금 병원에 있어. 너도 알다시피, 지금 우리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 

  어머니가 아프신 동안 나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어.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으면, 시간이 흐를 것이고, 시간이 흐르고나면 이 고통이 지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런데 생각을 안하려는 내 생각은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어. 나는 더욱 생각에 골몰하게 되었고, 이 비현실 속에서 더욱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더라. 나에게 왜 이러한 일이 생긴 것일까?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혹은 연인과 팔짱을 끼고 웃으며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봐. 그리고 그들과 다른 나를 봐. 적어도 내 인생에서만큼은 내가 주인공이기에 내가 생각하는 우주의 중심에는 내가 있어. 그러나 그 주인공은 비극의 주인공이야. 주인공은 도대체 나에게 이 비극이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 비극은 어떤 결말을 낳을 것인지, 계속 시나리오를 쓰도록 강요받고 있어. 때로는 이 시나리오의 부정적 결말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때로는 작은 단서를 붙잡아 반전을 꿈꾸는 일상의 반복이야. 이러는 과정 속에서 나는 그간 내가 붙잡고 있던 신념들을 다시 되돌아보며, 도대체 내가 어찌 생각하는 것이, '바르게' 생각하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되물을 수 밖에 없었어.


  잘 됐지. 나는 너에게 신(神)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 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 이전에 써놓았던 글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어. 나는 내가 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모르고 있던 것에 대해서 많은 말을 써놓았더라. 정작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없는 말들이면서, 마치 그 속에 무언가 있는 것마냥 잔뜩 허세를 부리고 있더라. 거짓과 허위가 갈 곳은 쓰레기통이 적절하지. 삶의 고뇌와 어려움은 생각을 걸러내는 정수기 필터와도 같아. 나는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은 카톨릭계 병원이야. 중환자실 대기실 옆에는 기도실이 있고, 그 기도실에는 카톨릭 공역 성경이 있어.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이 우주의 공허한 울림 속에, 나는 그 글자들을 붙잡을 수 밖에 없었어. 그간 글자에 매이면 안된다고 그렇게 말하고 다녔던 내가, 하나되기 위해서는 글자를 넘어서야 한다고 그렇게 텍스트를 비판했었던 내가, 결국 불안 속에서 집어든 것은 글자였어. 물론 기도도 하려 했지만, 나는 이 위기 속에서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도 몰랐어. 무언가 글자가 필요헸어. 내 인격을 관통시켜, 내가 먹고 호흡해야 할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어.


  그래서 보게 된 것이 요한복음 11장과 야고보서야.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해. 이것으로 내가 지금 숨 쉬고 있음을 알려. 숨으로 글자를 붙잡으니, 글자를 이전과 달리 새로이 보게 되었음을 밝혀. 


1. 요한복음 11장


  작년이었지, 내가 맹장수술을 받은 것이. 그때 너도 병원에 왔었잖아. 전신마취를 하고 깨어나는데, 내 옆에는 어머니가 계셨어. 졸려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데, 어머니는 계속 나에게 잠들면 안된다면서 나를 깨우셨어.(그랬던 엄마를 지금은 내가 깨우고 있어) 그 때 정신 못차리는 와중에 내가 횡설수설 말했던 성경구절이 있어.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그 와중에도 영어로 저걸 읊고 있었다니 내 허세가 무의식까지 닿는구나. 뼛속부터 죄인이로다. 

  저 구절이 등장하는 맥락을 말해줄게. 예수의 친구였던 나사로라는 사람이 죽었어.(카톨릭 성경에는 '나자로'라 되어 있더라) 예수는 고의적으로 그가 죽고나서 나흘이 지난 뒤에야 그를 찾아왔어. 제자들은 나사로를 보러 가려는 예수를 말렸는데, 왜나하면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다 근처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러나 예수는 알 수 없는 대답을 하시고는 나사로에게 가셨어. 

  "낮에 다니면 빛이 있으므로 넘어지지 않고, 
  밤에 다니면 빛이 없으므로 넘어진다. 지금은 낮이야."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째.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로 가득한데, 예수는 지금이 낮이므로 넘어지지 않는다 했어. 우리는 흔히 나에게 편한 것이 빛이고, 나에게 불편한 것을 어둠이라 생각하지만, 예수는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현장에도 빛이 있으면 낮이요. 낮에는 넘어지지 않는다 했어. 에띠! 내가 이 글자들을 읽고 무슨 생각을 했겠어?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밤일까, 낮일까?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 내가 넘어진다면 밤이야. 내가 넘어지지 않는다면 낮이야. 빛이 있으면 낮이나, 내가 눈이 멀어버리면 아무 소용없어. 빛도 있어야 하고, 내 눈도 떠 있어야 해. 그럼 넘어지지 않아. 내가 매 순간 빛 아래 있음을 깨닫기를, 눈 뜨고 그 빛 아래 비춰진 것들을 선명히 볼 수 있기를.

  그렇게 나사로를 찾아온 예수께, 마르다는 말해.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좀 더 일찍 오셨더라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텐데요!"

  나는 요새 이와 같은 말을 너무 자주 듣고 있어. 우리 엄마가 몇 시간이라도 일찍 수술을 받았더라면. 우리 엄마의 증세를 하루라도 일찍 알아챘더라면. 병원에서 조금 만 더 서둘러줬더라면. 내가 조금 더 엄마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하루종일 '그랬더라면'을 읊고 있는 나를 봐. 나는 마르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 오빠를 죽음으로 잃은 마르다도 나와 같은 심정인거야. 아마 하루종일 원인을 규명하고자 애쓰며 괴로워했을거야. '이랬다면', '저랬다면'. 그 무수한 탓들 중에 예수에 대한 탓도 있어. '예수께서 조금만 더 일찍 오셨더라면.'

  그러한 마르다에게 예수는 물으신다.

  "너는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느냐?"

  마르다가 대답하지. 

  "네, 마지막날 부활 때 오빠가 살아날 것을 믿지요."

  마르다의 대답은 시덥지 않은 대답이야. 전혀 희망과 기대를 걸지 않은채 말하는 대답이야.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 죽었던 유대인들이 다시 부활할 것을 믿고 있었으니까. 마지막 날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다시 부활한다는 소식은 분명 놀라운 소식이지만, 지금 아픔을 겪고 있는 가족들에게는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아. 나 역시 마찬가지야. 우리 엄마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부활하실 것이라 누군가 말해준다면, 나는 그 말에 아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로는 지금의 허탄한 마음을 채울 수 없어. 나는 지금을 원해. 지금 엄마와 서로 눈을 맞추고, 서로 대화하며, 그렇게 손을 붙잡고, 함께 꽃놀이 가는 지금을 원해. 그 지금과 멀리 떨어져 있는 저 미래의 부활이란 절망한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미래야. 마르다에게도 마찬가지 였을거야. 
그런데 저 마르다의 대답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삶이니,
  나를 믿는 이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이는 죽지 않을 것이다."

  예수는 시제를 바꾸었어. 시간을 뒤집었어. 부활할 것이라 말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인격화된 부활이라고 말했어. 예수는 역경을 이겨낸 삶 그 자체야. 곧 부활이야. 먼 머리에나 있었던 그 소망이, 예수를 통해서 마르다의 현재로 돌입한거야. 먼 미래에나 있을 '참 인간다움'의 소망이, 현실에 이뤄진 것이 예수고, 그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은 그 소망을 현재화하게 되는 거야. 이것이 복음이고, 구원이야! 말이 복잡하지만 사실 어렵지 않아. 꿈이 이루어 지는 거야.

  어제 병실에서 드라마를 보게 되었는데, 그 드라마에 나온 철없는 아버지가, 자신이 로또에 당첨된 줄 알고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하더라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인간답게 살겠습니다."  

  저 '인간답게'에 대한 생각들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저 말이 모든 사람의 소망을 보여준다고 생각해. 몸이 아픈 사람이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든, 생활고 때문에 어려운 사람이든, 인간관계 속에서 괴로워 하는 사람이든, 모두가 하나를 바라고 있어. '사람답게 사는 것'을. 그 사람답게 사는 것이 먼 미래에나 있을 일이고, 그 일을 위해서는 많은 돈과 노동과 내 편될 사람들이 필요하다 생각하지만,(그리고 이것들에 대한 소망을 이용해서 인간권력이 만들어지지만) 예수는 모든 것을 뒤집어, 소망이 이뤄지는 현실을 만들어. 지금 시작되는 인간다운 삶. 이러한 삶이 시작되는 것을 '믿음'이라 불러. 그리고 예수를 통해서 '지금' 인간다움이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은, 삶과 죽음의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왕을 그 자리로 모셔. 신약성서에 줄곧 등장하는 말이 이 지점에서 이해될 수 있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노부타를 프로듀스'군에게도 말했지만, 나는 사실 이전에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이고, 이것은 보이냐 보이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라 생각했지. 그래서 예수도 죽음을 잠이라 말씀하신 것이구나. 죽음은 그저 잠에 지나지 않구나. 별 것 아니구나. 삶과 죽음은 그저 생각하기 나름이구나. 어쩌면 이것은 만에 하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받을 충격을 어떻게든 완화시켜보려고 이레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그러니 괜찮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마치 속에서 뭔가 걸린듯이 내려가지 않았고, 계속 나를 불편하게 했어. 뭔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아니야. 틀렸어. 내 생각은 바르지 않았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위기에 있는 사람에게, 삶과 죽음은 다른 것이 아니니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고 말할 수 있겠어? 장자가 이렇게 했지. 자기 처가 죽었는데도 꽹과리를 치면서 노래 부를 수 있었지. 나 역시 장자가 되려 했으나, 글자들은 내 앞에 장자와 완전히 다른 태도를 가진 사람을 보여주었어. 


  예수는 울고 있었어! 아무렇지도 않게 나사로를 보내는 초연한 모습이 아니라, 예수는 울고 있었어!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그의 가족들을 포함해서 동네 사람 모두 울고 있었고, 예수는 그들과 같은 마음이었어! 그가 공감했던 마음이란 죽음에 대한 슬픔이야! 인간다움의 현현, 하나님의 아들이 눈물 흘린다면, 죽음은 정말 슬픈거야. 삶의 다른 이름이라면 이렇게 슬플 수 없어! 내가 속한 전통 위에서, 우리는 예수를 '사람으로 일어선 말씀'이라 고백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었으니, 그는 하나님의 인격화요, 역경을 이겨낸 삶의 전형이며, 다시 말해 '부활 사람'이야.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눈물을 흘리신다. 지금의 나처럼. 나는 너무 슬퍼. 가슴 한 구석이 콱 막힌 것 같고, 괴로워.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누가 이 마음을 알아주겠어? 그러나 그 자리에 울고 있는 한 사람이 있어. 나와 같은 마음으로 울고 있는 한 사람이 있어. 

  성경에 "소망없는 자처럼 슬퍼하지 말고"라는 구절이었어. 이 말만 들으면 소망이 있으면 슬퍼하지 말라는 말로 들리지만, 그렇지 않아. 소망이 있는 슬픔이 있고, 소망이 없는 슬픔이 있는거야. 그리고 소망이 있더라도, 그 슬픔은 아플 수 있어. 마르다를 봐. 그리고 나를 봐. 미래의 소망을 믿고 있으면서도, 현실에 닥친 이 고통에 대해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해. 그저 무릎꿇어 기도할 뿐이야.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셨던 하나님도, 이와 같은 슬픔이야. 죽음으로 찾아오는 인간의 절망. 무력함.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에 공명하는 그 쓰라림. 


  그러나 슬픔이 끝이 아니야. 이제 이 장면에서 역전이 벌어진다. 먼 미래라고 생각했었던 그 소망이 현실로 돌입하고, 조금 전에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야" 라고 말씀하셨던 그 말씀 그대로, 삶과 죽음의 헤아릴 수 없는 간극이 메워진다. 무덤을 향해 소리치는 그 외침으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죽은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살아남으로.

  이 글자들을 읽고서 나는 생각을 고쳐 먹었어. 살아서도 삶의 추구, 죽어서도 삶의 추구야. 다른 것은 있을 수 없어. 죽음의 영향력 앞에서, 나는 살아서는 병고침으로 저항하고, 죽어서는 부활의 소망으로 저항해. 삶이 아닌 다른 것은 죽음이요, 무의미요, 비현실이요, 나는 이따위 것들과 결코 짝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어. 이렇게 생각을 고쳐 먹으니 기도할 수 있었어.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꺼림찍 하더나,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이전과 달리.

  그리고 내 손에는 야고보서가 들려졌어.



WRITTEN BY
파다고기

,




Adam Levine - Lost Stars

길 잃은 별들


Please don't see just a boy caught up in dreams and fantasies

Please see me reaching out for someone I can't see


날 공상과 환상에 붙잡혀 있는 소년으로 보지 말아요.

볼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해 끈질기게 나아가는 나를 알아줘요.


Take my hand let's see where we wake up tomorrow

Best laid plans sometimes are just a one night stand

I'd be damned Cupid's demanding back his arrow

So let's get drunk on our tears and


내 손을 잡아요, 우리가 내일 깨날 곳을 함께 보러가요.

가장 잘 갖춰진 계획도 그저 하룻밤 즐거움에 지나지 않아요.

이런, 큐피드가 화살을 다시 돌려달래요.

그러니 어서 우리 취해버려요. 우리의 눈물을 마시고.


God, tell us the reason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It's hunting season and the lambs are on the run

Searching for meaning

But are we all lost stars, trying to light up the dark?


하늘님! 우리게 이유를 말해주세요.

젊음은 젊은이들에겐 소용이 없는건가요?

젊음은 사냥철이고, 양들은 뜻을 찾아 달리고 있어요.

허나 우리는 캄캄함을 밝히려고 애쓰는 길 잃은 별들인가요?


Who are we? Just a speck of dust within the galaxy?

Woe is me, if we're not careful turns into reality


우리는 누구인가요? 그저 은하수 안에 갇힌 먼지들인가요?

나는 괴로워요, 우리가 현실로 돌아서는데 마음을 쏟지 않을까봐.


Don't you dare let our best memories bring you sorrow

Yesterday I saw a lion kiss a deer

Turn the page maybe we'll find a brand new ending

Where we're dancing in our tears and


함부로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들로 슬퍼하지 말아요.

어제 나는 사슴에게 입맞추는 사자를 보았어요.

페이지를 넘겨요.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결말을 발견하게 될거에요.

거기서 우리는 눈물 범벅이 되어 춤을 출거에요. 


God, tell us the reason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It's hunting season and the lambs are on the run

Searching for meaning

But are we all lost stars, trying to light up the dark?


님이여! 우리게 이유를 말해주세요.

젊음은 젊은이들에겐 소용이 없는건가요?

젊음은 사냥철이고, 양들은 뜻을 찾아 달리고 있어요.

허나 우리는 캄캄함을 밝히려고 애쓰는 길 잃은 별들인가요?


I thought I saw you out there crying

I thought I heard you call my name

I thought I heard you out there crying

Just the same


나는 거기서 울부짖는 당신을 본 것 같아요.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당신을 들은 것 같아요.

나는 거기서 울부짖는 당신을 들은 것 같아요.

꼭같이.


God, give us the reason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It's hunting season and this lamb is on the run

Searching for meaning

But are we all lost stars, trying to light up the dark?


님이여! 우리게 이유를 말해주세요.

젊음은 젊은이들에겐 소용이 없는건가요?

젊음은 사냥철이고, 양들은 뜻을 찾아 달리고 있어요.

허나 우리는 캄캄함을 밝히려고 애쓰는 길 잃은 별들인가요?


But are we all lost stars, trying to light up the dark?

But are we all lost stars, trying to light up the dark?


허나 우리는 캄캄함을 밝히려고 애쓰는 길 잃은 별들인가요?

허나 우리는 캄캄함을 밝히려고 애쓰는 길 잃은 별들인가요?


WRITTEN BY
파다고기

,

* 이 글은 '에띠'라는 가상의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였습니다. 


에띠 보아.


  에띠! 삶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나는 이런 철없는 생각들을 종일 하곤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라는 것은 과연 있을까. 있다면 어찌 드러낼 수 있을까. 오늘 우리네 삶이 '현시창'이라는 데에는 모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왜 우리는 이것을 해결하는 일에 모든 것을 걸진 않는걸까? 이러한 질문들은 20대 때에 하던 것인데, 33살이 된 오늘도 여전해. 세상에 대해 묻는 질문들은 언제나 '난 어찌 살아야하지?' 로 귀결되어버려. 내가 어찌 살까를 물으면, 난 또 혼자서 '난 누구지?'를 나에게 되묻고 있어. 가끔은 이런 내가 바보처럼 느껴져.




  에티오피아는 어때? 널 보려고 한 번은 꼭 가려고 했는데, 너희 나라는 여행경보 1단계더라. 기독교 유적이 많은 곳이라 꼭 한 번 가보고 싶은데 말이야. 혹시 내가 너희 나라에 갈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까? 여기든 거기든 현시창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의 인간성을 압박받는 건, 여기나 거기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 여기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그렇다고 인간성에 대한 압박이 없는게 아니거든. 몸이 편하면 정신이 피곤하고, 정신이 편하면 몸이 피곤해. 왜 서로를 피곤하게 하는걸까? 왜 인간은 이 피곤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까? 이게 혹시 다 간 때문에?




  에띠! 난 경전을 꺼내들었어. 같은 문제로 고민했던 사람들이 써놓은 글을 보면,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책이 귀했던 그 옛날, 꼭 써두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글자들이라면,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피 흘렸던 글자들이라면, 나에게 무언가 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 그래서 내가 오랜 책들을 읽고 마음에 새긴 것들을 너에게 말하려고 해. 그런데 이런 말을 적고 있는데, 불현듯 나는 어쩌면 경전을 들여다 보기 전에 답을 이미 얻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왜냐하면 나는 들여다보고 나에게 읽혀진 대로 받아들이겠다고 작정하고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 것이니까. 받아들이겠다고 작정한 것을 '믿음'이라 부를 수 있다면, 나는 그 글자들이 보여주지도 않은 의미들을 먼저 믿어버리고, 그 다음 들여다보기 시작한거야. 이상하지 않아?


  이것 저것 보고 생각해서, 나에게 뚜렷해진 것이 있어. 그런데 그것은 사실 이미 내 속에서 뚜렷했기에, 내 눈에도 뚜렷하게 보인걸거야. 내 속에서 뚜렷한 것이, 네 속에서도 뚜렷할 것이라 바라는 것은 허튼 기대일까? 여기와 에티오피아는 거리가 멀지만, 그럼에도 같은 것을 너와 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말이야. 그것을 '인간다움'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에띠! 내 속에 있는 게, 네 속에서도 일어나면 너무 좋겠어! 그래서 난 이 글을 써.



1. 한 처음



  무엇부터 하면 좋을까? 그래 '시작'부터 해보자. 무언가를 뚜렷이 드러내려면, 그 시작을 분명히 해야해. 시작을 알고자 함은 '역사'야. history라는 말은 본래 '탐문'이란 뜻이 있다 하더라. 탐문은 현재를 만든 과거에 대한 추적이니, 역사를 생각하는 인간은 현실을 설명해줄 근원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있어. 과정을 더듬어 '근원'에, '시작'에, '첫'에 닿고 싶은거야. 


  하지만 역사의 한계도 분명해. 역사는 그 근원을 속 시원하게 말해줄 수가 없어. 이건 학문의 한계이기도 해. 보이는 것을 근거로 삼아 과거를 추적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는 눈에서 멀어지고 있어. 생각해보면, '지금'을 뺀 다른 시간의 지평은 모두 보이지 않는 차원이야. 우리는 과거의 시작도, 미래의 끝도 볼 수 없어.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처지야. 그게 인간일까. 보이지 않는 것에서 의미를 얻어다가, 보이는 것을 규정할 수 밖에 없는 존재. 우리는 이것을 '삶'이라 부르잖아.

 

  다행스럽게도, 시간의 더미에 묻혀버린 그 '시작'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 바로 과학자들이야.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그런 의미에서 과학자라고 생각해그들은 그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은 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지. 바로 물질이야. 그래서 물질을 연구하고, 또 그 물질 사이의 질서를 더듬어가며 그 시작을 재구성해. 그래서 그들이 내놓은 이야기를 너도 알거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 한 점에서부터 폭발되듯 생성되었고, 그 첫 폭발에서부터 모든 생명들이 탄생할 수 있는 초기조건이 구성되었다는 이야기. 그래, 빅뱅! 일본말로는 비꾸방구!


 얘네 말구


  보이지 않는 그 시작을 말하는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 바로 종교인들이야. 그래서 종교와 과학은 이 시작을 놓고서 서로 대립해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그렇다고 섯부르게 어느 한 쪽만 옳다고 생각하진 마. 종교인들은 물질을 연구하는 과학자와는 달리 종교인은 비물질(이런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어. 영혼, 인격, 정신, 이데아, 어찌 표현하면 좋을까)을 연구할 뿐이야. 비물질은 말그대로 물질이 아니라서, 이름붙이기 애매해. 그래서 가끔 종교인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발생한다구. 같은 것을 다르게 이름 붙였기 때문에 싸우는 것을 뺀버린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 것들을 많이 좁혀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여간 종교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 아닌 것이, 물질과 마찬가지로, 시작부터 흘러 내려왔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야. 그리고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기록하고자 한 것이 다름 아닌 경전이야. 눈에 보이는 글자로 써놓으려니,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어? 그래서 경전은 읽기도 어렵고, 물질만 이야기하는 오늘날은 더더욱 이해하기가 어려워.  


 노자라는 사람의 글을 볼래? 아래는 한땀한땀 나의 발로 해 본 번역.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옳다는 길이 항상 길이 아니듯,

옳다는 이름이 항상 옳은 이름 아니다.

이름 없음에서 우주가 창조되었고,

이름하야 만물의 어머니라 하더라.

고로 항상 멈춰있어 그 기묘함을 꿰뚫어보고,

항상 움직이며 그 돌아감을 꿰뚫어보니,

이 멈춤과 움직임은 한 가지에서 나왔으나,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함께 말하자면, '아득히 검고 검음', 

그 오묘함이 (드나드는) 문이다.



  에띠! 대체 노자는 무엇을 본 것일까? 이름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이름 없는 것이 있대. 심지어 사람들이 옳다고 이름 붙인 것도 다 옳은 것이 아니고,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옳음이 있다는거야. 그리고 이름 있는 것이든, 이름 없는 것이든, 다 한 근원에서 기원했다는거야. 

  세상이 이름 붙은 것과 이름 붙지 않은 것. 이렇게 두 차원으로 이뤄졌다는 이 노인네의 생각에 대해서 어찌 생각해? 아마 그도 살면서 이름 붙은 것을 겪고, 또한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를 겪었으니까, 이렇게 써놓은 것 아니겠어? 사람은 이름 붙은 것을 더 좋아하고 옳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잊어선 안되기 때문에, 저런 글을 남긴 것 아니겠어? 



  저 글을 읽는데, 나는 이런 동양화 그림이 생각났어. 이 그림을 보면, 난초가 눈에 확 들어오지만, 사실 이 그림에는 난초만 있지 않아. 그래, 여백도 있지. 여백이 있고, 그 속에 난초가 있어서, 이 둘이 '하나의 그림'을 이뤄. 그럼 이 여백과 난초의 근원은 무엇일까? 저 구석에 쓰인 글자가 보여주는 사람이겠지. 세상은 이름 없는 여백과 이름 있는 난초로 이루어졌어. 그리고 이 두 가지의 근원을 가르쳐주는 저 낙관이 경전이라 생각해. 그리고 저 이름의 주인공은, 저 완성된 그림보다 커. 내가 무슨 말하고 싶은지 알겠어?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을 물질이라 부르고, 붙일 수 없는 것을 정신이라 불러보자. 물질과 정신이 하나되어 하나의 사람을 이루고, 하나의 세상을 이뤄. 흔히들 이원론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배격하자고도 말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두 차원으로 생겨 먹었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생각이었어. 우리도 늘 겪고 있잖아. 미술 입시학원에서 가르치는 "발상과 표현"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차원과 보이는 차원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야. 이 두 차원을 하늘과 땅이라 부르던, 이데아와 현상계라 부르던, 형상과 질료라 부르던, 아니면 과학과 종교라 부르던! 모두 하나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임을 기억해야 해. 모두가 큰 여백에 그려진 그림들이라면,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어. 그리고 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기원을 생각해봐.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물질만의 시작이어도 안되고, 정신만의 시작이어도 안돼. 그리고 정신과 물질이 시작된 '한 처음'은, 정신과 물질의 합보다 커야 해. 저 그림보다 그림을 그린 이가 더 복잡하고, 고도의 존재인 것처럼 말이야.


  사람은 죽어가고, 또 죽는데도, 사람의 죽음과 상관없이 계속 이어져 내려온 두 개의 근거가 있어. 정신과 물질이야. 정신과 물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내 정신은 종교고, 내 몸은 과학이야.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을 경전이 밝히고, 눈에 보이는 차원을 실험이 밝혀. 이 둘은 하나라서 떨어질수가 없어. 나는 생각하면서 움직여. 이 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거야? <마의 산>이라는 소설에 보니, 세계가 두 가지 차원으로 이뤄졌다는 신부와, 한 차원 뿐이라는 인문학자가 계속 싸우고 논쟁하더라. 물질과 정신 중에 어느게 더 중요한지, 요새도 싸우기는 마찬가지야. 다 밥줄이 걸린 싸움이라 이리도 치열한 것일테지. 그런데 일단 내 밥줄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정말  시작이 무엇인지, 모든 사람이 납득할만한 처음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본다면, 우리는 이 두 가지 차원을 보두 생각해야 해. 


  마치 작곡가가 써내려간 노래라면 어때? 그 속에는 성대를 울리는 음표 있고, 소리를 내지 말아야하는 쉼표도 있어. 음표와 쉼표가 서로 비중을 놓고 싸우면 노래를 망쳐. 그러니 작곡자를 찾아가야 해! 음표와 쉼표를 만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낳은, 그 만물의 어머니를 만나자. 거기가 처음이야. 거기가 시작이야. 음표만 말하려는 무신론자와, 쉼표만 말하려는 종교인이 함께 어울려 사는게 우리 네 세상인데, 그 양쪽이 함께 생각해야할 '첫'이란, 눈에 보이는 것만도, 혹은 보이지 않는 것만도 아니라는 확신이야! 그것을 낸 존재. 음표와 쉼표가 흘러나온 그 한 처음,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원이라 할만한 그것이 우리 모두의 처음이어야 해. 그래야 너도 근원적이고, 나도 근원적이야. 우리는 같은 데서 나왔어. 쓰면서도 '이것 참 말로 하기 어렵네'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걸 다섯 들자로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다면 믿을테야?



一始無始一



  단군시대때부터 내려왔다고 알려진 <천부경>이라는 경전이야. 위작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다섯글자만으로 애송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위의 구절은 "하나가 있는데, 그 하나란, 모든 것을 비롯되게 하면서도, 비롯된 적이 없는 하나" 라고  수 있어. 이름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비롯되었던 그 노자의 그 문이, 바로 이 '하나(一)'라 생각해. 두 차원으로 이뤄진 이 세계의 참 근원. 그 근원이란 정말 시작이 없어야 하지. 근원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있다면 그 근원을 근원이라 부르면 안될테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도 같은 말이야. 모든 것을 움직이나, 정작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 그 하나. 만일 이 세계를 <성경>에서 처럼 '하늘'과 '땅'의 두 차원으로 적어 본다면, 우리가 지금 말하는 그 하나란, 결코 하늘일 수 없어. 하늘보다 높은 하나고, 하늘을 만든 하나지. "하늘 꼭대기의 하나"라는 표현이 좋을까? 그 하나는 정신만도 아니고, 물질만도 아니야. 오히려 그 두 가지가 비롯된 하나야. 그 하나를 창조의 하나라 부르던, 진화의 하나라 부르던 나는 개의치 않을래. 그 하나를 기억하느냐, 잊었느냐가 중요해. 기억해봐, 에띠! 우리 모두가 시작되었던 그 근원이야! 



  만일 그러한 하나가 있다면,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은 분명히 하나되어야 할 명분이 있어. 같은 어미 배에서 나온 한 형제이기 때문이야! 본래 한 민족이었던 남과 북이기 때문이야! 허나 그러한 하나가 없다면, 이 세계는 하나됨 없이 끝없이 분열될 뿐이야. 대화를 계속 이어갈 수록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슬픔을 알고 있어? 하나를 잊으면 우리는 마주 하는 모든 존재와 평행선이 될 뿐이야.  


  보이지 않는 차원과 보이는 차원이 하나되는 것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지행합일"이겠지. "작심삼일"이라는 말에도 두 차원이 들어있어. '작심'이라는 보이지 않는 차원과 '삼일'이라는 눈에 보이는 몸적 차원이. 이 두 차원이 하나되어야 함은 누구나 알아. 우리가 하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이 하나에 대한 느낌이 있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으면서도, 우리는 그 하나됨을 갈망하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지 않아? 그 하나에 대한 앎은 칸트의 말대로 정말 경험해보지도 않고서 알 수 있는 '선험적 지식'이야. 우리가 찾는 인간다움이란, 바로 그 하나에 있어. 정신과 물질의 조화, 생각과 몸생활의 하나됨, 옳은 생각이 참으로 이뤄짐. 


  에띠, 상상해봐. 이 하나됨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다면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곧 두 가지 차원의 하나됨이고, 이것을 세계적 차원으로 보면, 모든 분열과 전쟁의 끝이며, 우주적 차원으로 보면 보이지 않는 차원과, 보이는 차원의 하나됨이야. <성경>의 표현을 빌려쓰자면, 하늘에서 이룬 것이 땅에서도 이뤄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고, 모두가 하늘과 땅을 비롯되게 한 하나. 물질과 비물질이 시작된 하나. 일시무시일의 하나로 돌아감이야.


  이 하나를 가리켜,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나는 이어지는 글에서, 이 하나에 나의 존경의 의미를 담아 '님'자를 붙여 부르고자 해.


 땅 위에 난지 11671일에

파다고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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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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