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에 해당하는 글 43건



사도행전 18:19~28


  바울은 그리스도인들과 며칠을 더 머물다가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데리고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 그는 서원이 있어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 에베소에 도착하자 바울은 그 부부를 그 곳에 두고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과 논쟁했다.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좀더 오래 머물라고 청했지만 작별 인사를 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여러분에게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지도를 봐야할겁니다. 지도를 보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잘 들어오질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반드시 지도를 옆에 같이 펴놓고 봐야하는 책입니다. 바울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세 사람은 '아카이아 지방의 고린도'에 있었고, 고린도 동쪽의 겐그레아 항구에서 머리를 민 바울은, 그들과 함께 에베소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이 곳 에베소에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남겨둡니다. 이 사람들을 에베소에 남겨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에베소가 이른바 3차 선교여행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에베소를 떠나서 가이사랴로 갔다. 그 다음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 교회에 문안하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얼마간 지낸 후에 그는 다시 떠나서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지방을 두루 다니며 모든 제자를 격려했다.

  부부를 남겨놓은 뒤 바울은 홀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가로질러 가이사랴로 이동합니다. 가이사랴에서 조금만 더 가면 '그 교회'가 있습니다. 누가가 '그 교회'라 부르는 교회는 바로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갈 때는 언제나 '올라간다'는 표현을 씁니다. 예루살렘 공동체를 방문한 바울은 다시 안디옥으로 갑니다. 그 곳에서 얼마 지난 후에 갈라디아와 부르기아를 두루 다니며(지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1차 전도여행 때 세웠던 공동체들을 돌아봅니다.

  아볼로라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도착했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었다. 그는 언변이 좋고 성경 해석에 능했다. 그는 주의 도에 대해 배운 바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숨결 안에서 열심내는 사람이었고,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했지만 예수에 대해서 정확하게 가르쳤다. 그는 회당에서 담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의 말을 듣고 한쪽으로 데려가서 하나님의 도에 대해 더 정확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누가는 아볼로라는 새로운 인물을 소개합니다. 이 인물이 에베소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에베소에는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가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이들은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있었던 학문의 도시입니다.(물론 그 책의 대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지만 말입니다) 그 곳 출신인 아볼로는 학식있는 사람이었고, 게다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의 도'에 대해서 배운바가 있었다고 누가는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배운 주의 도는 요한으로부터 배운 것이었습니다. 즉 메시아가 오실 것이고, 그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세례를 받자는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요한이 말한 메시아, 예수에 대해서도 아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봐왔던 구약성경으로, 왜 메시아 예수이신지를 요령있게, 열정적으로 설명해나갔습니다. 여기서 열정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열심을 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의 가르침을 듣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한쪽으로 데려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무슨 얘기를 해준 것일까요? 짐작컨데, 아마도 아볼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구약을 통해서 가르칠 수는 있었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사도행전에서 이 아볼로에 대한 소개 이후 나오는 내용이,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던 요한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볼로는 예수가 주라는 사실을 회당에서 담대하게 전했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그는 성령 안에서 말씀을 풀어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아카이아로 건너가고 싶어 했다.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격려차 아카이아에 있는 예수 공동체에 그를 환영해주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곳에 도착한 아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신실한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메시아는 정말로 예수였다는 것을 성경을 가지고 입증하여 공개적으로 강력하게 유대인들을 반박했기 때문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부터 성령에 대해 전해들은 아볼로는 아카이아로 건너가고자 했습니다. 아카이아는 바울과 블리스길라 아굴라 일행이 얼마 전 건너온 곳이고, 고린도 공동체가 있는 지역입니다. 아마도 성경에 대해 분명한 지식이 있는 아볼로에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고린도 공동체를 도와줄 것을 부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아볼로는 떠납니다. 그리고 에베소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아마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에베소 지역에서 공동체를 이뤘나봅니다)은 아카이아에 있는 공동체에게 아볼로를 환영해주라는 편지를 보냅니다.

  아볼로는 그 곳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신실한 사람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 점이 고린도전서에도 언급됩니다. 물론 그의 영향력이 고린도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됩니다만, 이것은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고 두부 자르듯이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볼로의 영향력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분열의 기회로 사용하는 누군가들이 있을 뿐입니다.

  어찌되었든 아볼로라는 이름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회당에서 메시아가 예수라는 사실을 전하던 아볼로가, 이제 성령으로 교제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로 마침내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아볼로가 고린도 공동체에서 사역하는 동안, 바울이 지중해를 한바퀴 돌아서 다시 에베소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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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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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에 대한 내용을 다루기 시작하자마자, 이제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1년 6개월에 걸쳐 고린도에 있었다는 언급이 있었을 뿐, 사도행전에서는 고린도에서 있었던 자세한 일들을 알기 어렵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린도전서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 다른 두 책을 번갈아보며, 당시 사건을 재구성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18:12~18입니다. 각자의 성경을 가지고 먼저 본문을 읽어보는게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갈리오라는 사람과 아가야라는 지명으로 시작합니다. 모르는 지역에서 있었던, 모르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시작부터 지루할테니, 일단 갈리오가 누구이며, 아가야가 어디인지부터 알아봅시다. 사실 갈리오보다는 그 형이 더 유명합니다. 갈리오는 스토아 철학자로 유명한 세네카의 동생입니다. 소크라테스와 같이 자신의 죽음을 떳떳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유명하지요. 세네카는 네로 황제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그 동생인 갈리오는 아가야 지방의 총독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갈리오가 언급되는 이 본문은 성경과 역사책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갈리오가 총독을 지낸 것이, A.D.51~52였으니, 우리는 바울의 일대기도 역사의 어느 시점인지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아가야는 오늘날 그리스 지역입니다. 아래 지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지도에서 아굴라의 고향인 '본도'를 확인해봅시다. 그리고 '고린도'도 찍어보시고요. '아가야'도 찾아봅시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역 안에 속한 도시 이름입니다. 즉 아가야의 총독은 고린도의 일도 관할합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으로 있을 때, 즉 A.D.51~52 어느 날에,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던 바울을 유대인들이 붙잡아 갈리오에게 끌고 왔습니다. 그를 끌고 온 이유가 13절입니다.

사도행전 18:13
"이 사람은 사람들에게 불법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가르칩니다" 라고 그들이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저 '불법적인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가르쳤기에, 유대인들은 바울의 방법을 '불법'이라 생각했던 것일까요? 아마도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합법적인 방법'이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만으로 예배의 자격을 제한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토라(그들은 '법'이라 불렀습니다)에 합당한 방식이라 생각했습니다. 즉 토라는 자신들의 지위를 지켜주는 하나님의 법이었고, 이 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공동체는 토라를 이루는 방식이 할례에 있지 않고 신실함에 있으며, 따라서 할례를 받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 신실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예수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 이 점을 가리켜 유대인들은 '불법적인 방법'이라 말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이들은, 이 '예수를 통한 하나됨'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갈리오가 보기에는, 유대인들의 이 기소내용은 별로 문제가 되거나 위험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시다.

사도행전 18:14,15
바울이 말을 하려고 하는데 갈리오가 개입했다.
"유대인들이여, 보시오. 이것이 심각한 범법 행위나 위험한 학행의 문제라면 내가 여러분의 탄원을 제대로 받아들이겠소. 그러나 이것이 여러분의 관습에 속한 말과 이름과 율법에 대한 논쟁이라면 여러분끼리 해결하시오. 이런 문제에 내가 재판관 노릇을 할 생각은 없소."

  갈리오는 유대인들과 예수 공동체의 일이 그저 특정 지방의 종교에 국한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율법에 호소할 일이라면 율법에 따라 해결할 일이지, 로마의 총독인 자신의 일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로마의 총독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폭동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팍스 로마나를 유지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즉 황제 중심으로 전세계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이 로마의 목적이었습니다. 점령지역에서 벌어지는 소요는 그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의 입지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빌라도가 예수의 처형에 눈감아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예수 공동체를 불법으로 규정한 유대인의 생각은 토라를 통해 비춰보아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그의 편지들에게 밝히 드러낼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 공동체는 사회의 암적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은 '사랑'이었고, 말리기는 커녕 칭찬해줘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리오의 이러한 판단은, 이 아가야 지역에서 예수 공동체가 불법이 아니라는 판례로 남게 되었고, 앞으로의 선교에 더욱 힘을 실어줄 것입니다.



  바울을 기소한 유대인들은 이렇게 갈리오 앞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자 유대인 무리들이 새로운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 재판정 앞에서 마구 팼습니다.(소스데네 전에는 그리스보가 회당장이었으나, 그는 어제 본문에서 주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새로이 회당장이 된 소스데네가 사람들을 선동했을 것이고, 갈리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유대인들이 분에 못이겨, 자신들의 지도자에게 책임지라며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갈리오는 유대인들이 서로 분열하며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저 지켜만 봤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잘못 판단하고 있다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까지 읽고서, 소스데네가 무척이나 불쌍해졌습니다. 회당 식구들에게 얻어맞은 회당장이라니요. 그런데 이 얻어맞음이 그에게 복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소스데네는 회당장의 직위를 버리고,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바울과 함께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첫머리에 언급되는 영광을 누리며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1
하나님의 뜻에 따라 왕이신 예수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과 우리 형제 소스데네가...

  갈리오의 재판이 끝난뒤, 바울은 며칠있다가 고린도를 떠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떠납니다. 이 때 소스데네가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보아, 소스데네가 이 때 합류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이제 이 천막쟁이들은 배를 타고 시리아로 떠납니다. 아래 지도를 봅시다.

  바울은 고린도 동쪽 끝에 있는 겐그레아 항구에서 머리를 깎습니다.(겐그레아는 '뵈뵈'라는 여자가 살고 있는데, 나중에 바울은 이 여자에게 <로마서>를 그녀의 손에 맡깁니다.) 18:18에 보면 "그가 서원한 것이 있어" 머리를 깎았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무언가 중요한 임무에 임할 때, 머리를 깎지 않고 내버려둡니다. 나실인 규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 규정 중에 머리를 깎지 않는 것이 있었거든요.(삼손도 나실인이었습니다. )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보낸 1년 6개월간 고린도에서 사역하면서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 있었고, 그 약속을 잘 지켰기에 그간 머리를 자르지 않다가, 이제 고린도를 떠나면서 머리를 자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새로운 지역 '에베소'로 떠납니다. 우리도 일단 바울을 따라서 좀 더 다녀봅니다. 고린도는 떠났지만, 아직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등장인물 소개가 덜 끝났습니다.



  생각할 거리들을 좀 만들어봤습니다.

*유대인처럼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해코지한 적이 있습니까?

*소스데네와 같은 경우를 겪은 적은 없습니까? 나에게 끔찍한 불행이 닥쳤다고 생각했으나, 후에 이 일 때문에 안도의 한 숨을 내쉰 경우 말입니다.

*역사와 성경이 연결되는 지점을 어찌 보셨습니까? 성경을 종교에 국한한 책으로 보는 것의 문제점을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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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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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 + 사도행전> 시리즈를 시작합니다('고린도행전'이라 부르면 어떨까요?:)). 전부터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따라, 바울의 편지들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왼뺨대기와 함께 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올 해 여름방학이 끝날무렵, 예기치 않게 모였던 몇몇의 왼뺨들은, 한 학기 바쁜 와중에도 함께 공통본문을 정해서 연구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사전에 모의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공통본문이 고린도전서 + 사도행전으로 정해졌습니다. 신기하게도!

  하지만 이 일이 참 막막하기만 합니다. 한 달이 넘도록 준비하고서 연재를 시작한 <로마서>와는 달리,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는 제게 익숙한 본문도 아닐뿐더러, 아직 준비도 미흡한데, 새 학기는 벌써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손에 잡히는대로 연구하고, 글을 올려볼까 합니다. 부족한 부분들은 다른 왼뺨대기 식구들이 보완해주리라 생각합니다.

  일단 시작점은 분명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지역에 머물렀을 때 이야기를 해야하니, 사도행전 18장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시작인 사도행전 18:1~11입니다.

  바울은 철학자들과 논쟁했던 아테네를 떠나 이제 고린도로 들어옵니다. 거기서 '아굴라'라는 유대인을 만납니다. 이 사람은 '본도(Pontus, 흑해 아랫 지방을 가리켜 부르는 말입니다.)' 지역 출신의 사람이라 써있습니다. 이 사람 고향은 본도이지만, 살던 곳은 로마입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바울이 이 사람을 만난 곳은 고린도입니다. 이렇게 여기 저기 이사가 잦은 사람은 무언가 사연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사연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 살펴보기로 하고, 호구 조사부터 해봅시다. 이 사람의 부인 이름은 '브리스길라'입니다. 이 사람들 이름을 잘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도 언급되고 로마서에도 언급되는 이들은, 바울과 아주 친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사도행전 18장은 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이 사람들은 이탈리아, 즉 로마에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누가복음의 그 '누가')는 '글라우디우스 칙령' 때문에 이들이 고린도로 오게 되었다고 말해줍니다. 글라우디스는, 그 유명한 네로 바로 전의 로마를 다스렸던 황제의 이름입니다. 이 글라우디스는 유대인을 엄청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죄다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의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도 로마에서 쫓겨나 고린도로 와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갑작스레 집 떠나와 타지에서 살게 된 이 사람들은 무엇으로 먹고 살 수 있었을까요? 유대인들은 오랜 포로생활을 겪으면서, 어린 자녀에게 먹고 살기 위한 기술을 하나씩 가르쳐주는 것이 전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돌을 다루는 석수 일을 어려서부터 배우셨습니다.(흔히 목수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이스라엘 지역에서 나무는 부자들만이 다룰 수 있는 고급 재료였습니다. 희랍어로 '기술자'라는 단어가 영어 capenter로 번역되면서 우리나라에도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로 전해진 것이지, 실제로는 석수가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 아굴라는 천막 만드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타지에서도 천막을 만들며 먹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굴라 부부가 바울과 친해진 계기도 아마, 동종업에 종사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울도 천막 만드는 기술로 먹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갓 태어난 예수 공동체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예수 공동체에게 전하는 편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여기에 "밤낮으로 일하면서" 라는 말이, 밤낮으로 천막 만드는 일 했다는 소리입니다. 바울은 이때만 해도, 이 돈을 안받고 사역하는 문제 때문에, 그를 사도로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여하튼 앞에서 말했던 글라디우스 황제의 추방 명령은 글라우디스가 죽고 네로 황제가 즉위하면서 해제됩니다. 그리고 추방 명령 때문에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이, 대거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됩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도 이 때 로마로 다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로마에서 유대인들은 쫓겨났지만,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는 쫓겨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유대인들이 다시금 로마로 돌아오는 상황 속에서, 로마에 남아 있던 (이방인으로 구성된) 예수 공동체는 이 유대인들을 어찌 대해야 할까요? 메시아 예수를 죽인 그 유대인들을 예수 공동체는 어찌 생각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답변이 필요했고, 바울은 답변이 포함된 편지를 로마에 보냅니다. 그 편지가 바로 <로마서>입니다.(9~11장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는, 우리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6:3
여러분은 메시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십시오.

  바울은 지역마다 다니면서 예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사명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방법은, 그 지역의 회당에 먼저 찾아가서 유대인에게 먼저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이어서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포로기를 겪던 이스라엘은 세계 곳곳에 뿔뿔히 흩어져 살았지만, 그럼에도 토라대로 살기 위해서 정착하는 곳마다 '회당'을 세웠습니다.(오늘날에도 회당이 전세계에 퍼져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회당을 중심으로,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에게 먼저 메시아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접점'으로 부름받았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복음이 유대인에게 먼저 전해지고, 이 복음이 흘러 이방인에게도 전해지는 방식이 하나님의 방식이고, 자신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접점에 놓인 사람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직무를 '이방인의 사도'라 말할 때는, 바로 저 접점의 사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바울은 '낀 사람'입니다. 박쥐처럼 이간질을 위해 끼어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을 복음으로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 끼어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도 먼저 회당부터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의 회당에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을 반대하고 비난합니다. 그러자 바울이 자신의 옷을 털면서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피가 여러분의 머리에 있습니다! 나는 무죄합니다. 이제부터 나는 이방인에게 가겠습니다."  이 '피가 머리에 있다'는 말은 저주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복이고, 이것을 거절하면 저주라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언약과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길,

창세기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의 후손, 메시아 예수의 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복과 저주의 기준입니다. 메시아 예수의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희망도 없습니다. "자신의 피가 자신의 머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바울은, 자신을 배척한 사람들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서 아예 단절하고 그들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회당에서 나온 바울이 어디로 가는지 18:7에 나와 있습니다. 회당 바로 코 앞에 사는 유스도의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그 유스도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회당에 있던 사람들 중에 회당장이었던 그리스보도('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보') 예수를 믿습니다. 바울은 츤데레같은 구석이 있습니다. 바울은 회당 건너편 유스도의 집에서 머물며, 맞은편 회당의 유대인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며 강론 했을 것입니다. 피가 머리 위에 있다고 말했으나, 아직 돌아올 수 있는 문이 열려 있다고,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대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에 대하서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자세히 풀어놓습니다. 이 방법에 제목을 붙인다면, '사랑은 질투를 일으키고'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그 사랑 밖에 있는 사람들이 질투하고 부러워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참여하고 싶어서 몇 사람이라도 돌아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라 말합니다.

로마서 11:11,12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 완전히 고꾸라졌습니까? 일 없습니다. 오히려 저들의 비뚤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에 이르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옆에서 그 구원을 질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스라엘의 비뚤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피폐함이 이방의 풍성함이 되었다면, 이스라엘(이 돌아왔을 때)의 풍성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의 동족들이 모인 회당에서는 쫓겨나고, 그 건너 편 집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데도 전혀 유대인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환상 속에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아라. 계속 말하고 침묵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환상 이후,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정착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게 됩니다. 웬만해서는 한 지역에서 오래 머물지 않던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며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고린도에 있는 예수쟁이들과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는, 바로 이 시절 모이게 된 예수 공동체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고린도전서 1:1~3
하나님의 뜻에 따라 왕이신 예수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과 우리 형제 소스데네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공동체에 이 편지를 보냅니다. 여러분은 각처에서 왕이신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왕이신 예수 안에서 거룩해졌고, 거룩함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분은 우리뿐 아니라 그들의 주도 되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왕이신 주 예수로부터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내일은 저 편지의 서두에 언급되어 있는 '소스데네'와 있었던 일에 대해서 들여다 보겠습니다.


*위 내용을 알고서 사도행전 18:1~11을 보면 훤히 보일 것입니다.

*본문에 대한 질문과 느낀 점, 혹 삶에 대한 적용이나,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표현 방법이 있다면 댓글로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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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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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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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한 의문자가 있었는데

Once upon a time there was a question who

 

아들과 함께 어떤 집에서 살았어요.

I lived in a house with my son.

 

집에 에어컨이 없어서 너무 더웠어요.

The lack of air conditioning in the house smoked too.

 

의문자가 말하기를 이세상엔 더 나은 곳도 없단다.

Eopdanda yen this world a better place even say self-doubt.

 

하지만 냉철함이 아들에게 일러주기를

But naengcheolham the boiler cycle to a son

 

넌 은행으로 떠나야해!

You have to leave the bank!

 

(Flaminsky님 패러디, 영어는 토씨하나 안 건든 구글번역기.)

 

 

 

그렇다. 은행만큼 시원한 곳이 없다.

 

아프리카 가나에 사시는 이모님께서 몇일 전 한국에 오셨다.

 

이모님 왈

 

“뭔 나라가 아프리카보다 더 덥냐.."

 

급변 하는 날씨에 벌써 여름이 왔구나 싶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귀차니즘도 한층 더해진다.

내일 써야지 하면 곧 잊어버리곤 말일이 돼서야 급하게 글을 쓴다.

망각은 신이 준 축복이다. 필자는 이 축복을 자주 사용한다.

벌써 3번째 글이 되었고 이제 익숙해질 법 한데 매순간이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인 것 같다.

하지만 가볍게 하기 위해 오늘도 필자는 키보드를 건든다.

 

 

 

1막 1장 웃기는 짬뽕

 

 

필자는 더운 날에도 냉면보다 짬뽕이 더 생각난다.

짬뽕을 많이 좋아한다. 때문에 짬뽕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맛있는 짬뽕집을 찾기도 한다.

어릴적부터 짜장면 먹은 횟수를 따진다면 열손가락안에 든다.

짬뽕만 먹었기 때문인데 짬뽕맛은 크게 두가지다.

‘해물맛과 고기맛’

어떤집은 해물맛으로 국물을 내거나 어떤집은 고기맛으로 국물을 낸다.

필자는 해물을 좋아하기에 해물맛을 좋아한다.

보통 해물맛은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 짬뽕일것이고,

고기맛이라고 하면 돼지고기를 먼저 볶은 뒤 조리를 하는 것이다.

서두를 보면 알겠지만 그렇다. 오늘은 짬뽕라면이다.

 

짬뽕이란..

해물 혹은 고기와 다양한 야채를 기름에 볶은 후 육수를 넣고 끓여서 국수를 마는 매운 맛의 탕면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자장면과 더불어 서민의 인기메뉴이다.

 

짬뽕은 한국유래설과 일본유래설이 있다. 한국에서는 19세기 말 인천에 살던 산둥성[山東省] 출신 중국인들이 그들의 음식인 ‘차오마멘(炒碼麵)’을 한국인의 식성에 맞게 달고 맵게 변화시킨 음식이다. 주위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채소와 해물을 섞어서 만들어서 ‘서로 다른 것을 뒤섞음’을 뜻하는 일본어 ‘짬뽕’이 붙어졌다.

 

일본에서는 19세기말에 나가사키(長崎)의 중식당 시카이로(四海樓)의 창업자 천핑순(陳平順)이 탕루시멘(湯肉絲麺)을 변형시킨 맵지 않은 국수이다. 당시 푸젠성[福建省] 유학생들이 가난해서 식사를 거르는 것을 불쌍히 여긴 그가 이들에게 국수를 대접하였고, 그들의 사투리로 인사를 ‘챵호(식사하셨습니까?)’라고 하는 것을 일본인들이 ‘짬뽕’이라 잘못 알아들어서 아예 국수 이름이 짬뽕이 되었다고 한다. 두 나라의 항구에서 생겨난 다른 맛의 중국식 국수가 ‘짬뽕’이란 이름을 공유하게 되었다.

 

[Jjamppong, Chinese·style noodles with vegetables and seafood, 炒馬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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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이런 식.. 익숙해질때도 되지 않았나..?

 

 

 

이 짬뽕이 유래가 참 애매하다.

그래서 중국요리인것인가 일본요리인것인가 한국요리인것인가

필자는 한국요리라 하겠다. 한국인 입맛에 새로이 재탄생된 요리이기에

‘짬뽕’이란 순수한 이 음식만으로 볼 때는 한국요리가 맞는 것 같다.

중국에는 짬뽕이 없단다. 얼큰한 걸 좋아하는

우리 입맛에 정말 딱 인 요리이다.

이 짬뽕의 기본베이스가 된 음식은 짬뽕이 아니지 않는가?

뭐 어찌됫든 따지진 말자. 내말도 옳고 당신말도 옳다.

우리는 틀린 게 아니라 그저 다른 생각을 가졌을 뿐이니

시시콜콜 따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럼 짬뽕은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

필자는 짬뽕을 순서라고 말하고 싶다.

근데 이 짬뽕이 참 웃기다. 요리순서에 따라 다른 요리가 되기 때문이다.

우선 야채와 해물 또는 고기를 양념과 함께

볶은 뒤 물을 넣어야 짬뽕이 된다.

하지만 일반적인 방법처럼 물을 끓인 뒤 야채와 해물 또는 고기를 넣고

양념을 넣어 요리를 한다면 그냥 ‘국’ 이 될 것이다.

자세히 만드는 방법은 아래 소개될 짬뽕라면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길거리를 다니다보면 짬뽕집 정말 많다. 또한 체인점도 상당히 많다.

전국5대 짬뽕....2014년 우승 짬뽕....최강달인 등등

대체 전국 공동 5대 짬뽕이 몇 명인거냐..

대체 우승자를 몇 명이나 뽑은 거냐..

대체 최강자가 몇명이냐..

본점 딱 한사람, 본점가게 딱 한곳에서 상을 탔을 것인데

왜 체인점마다 자기네도 똑같은 전국 5대 짬뽕이며 우승자인건가..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하는 방법은 같아도 요리하는 사람의 따라

맛은 미세하게 달라진다고..

몇십년의 노하우와 스킬을 단 일주일만에

배워 체인점을 차려 전국 우승자가 될 수 있다면 참 허무한 세상이겠다.

웃기는 짬뽕이다.

 

참 맛있는 짬뽕 많지만 안타깝게도 저런식의 권모술수 때문에

전국 6대 짬뽕사장님과 2014년 준우승 짬뽕사장님은

2347828번째로 맛있는 짬뽕이 되었다.

 

뭐 어쨌든 이 순간부터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짬뽕은 간단하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요리로 변모할 것이다.

물론 짬뽕라면일뿐이지 짬뽕을 만드는게 아니다.

짬뽕을 만들기 위해선 좀 더 다른 조리법이 있지만

짬뽕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미봉책 정도로 하겠다.

잘 따라와 주길 바란다.

 

 

 

 

1막 2장 짬뽕라면

 

재료 : 매운라면, 고추기름, 마늘 아빠 반숟깔, 양파반개, 해물

 

생각보다 준비물 간단하다.

라면은 매운라면으로 아무거나 사용해도 될 것이다.

필자는 바지락살과 오징어만 사용했다.

짬뽕은 불맛이라고 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센불로만 요리를 한다.

하지만 초보인경우에는 태울수 있으니 중간 중간 불조절에 대해

설명하겠다. 잘 할수 있을 때 도전해보시라.

센 불로만 요리를 한다면 훨씬 더 맛있는 짬뽕 요리가 될 수 있다.

 

1. 뜨거운 물(라면 정량)을 준비한다.

전기포트 아니면 물을 먼저 끓인 뒤 옆에 놓아두던가 해두자.

뜨거운 물을 부어야만 신속한 조리가 될 뿐만 아니라 찬물로 했을 때

맛의 변화나 질감이 틀려진다.

 

2. 냄비에 고추기름을 충분히 두른다. 아빠 3숟깔정도.

냄비를 먼저 살짝 달군뒤 고추기름을 두르도록 하자.

고추기름이 없다면 식용유를 두른 뒤 은은한 불에

고춧가루 아빠 1숟깔을 넣고 살짝 볶아준다.

식용유에 고춧가루를 넣고 고추기름 만들려면 타지 않게 조심해야한다.

괜히 실패하지 말고 그냥 고추기름 조그만한거 하나 사라!

의외로 고추기름 쓸 곳이 많다. 순두부찌개 돼지찌개 짬뽕 볶음밥 등등..

내가 그거 다 사용 할 수 있을 만큼 여러 요리법을 계속 알려주겠다.

어쨌든 불은 약하게 한다.

 

 

3. 준비한 마늘과 양파를 넣는다.

마늘은 다지고 양파는 얇게 채 썰어서 준비 해 놓는다.

양파는 많을수록 단맛이 더해진다.

편히 넣어도 되겠다.

그리고 30초정도 살짝 볶으며 익혀준다.

불은 약하게 한다.

 

 

4. 준비한 해물과 라면 스프를 넣는다.

해물은 보통 새우나 바지락 오징어 등을 넣는다.

상어, 고래 기타생선만 아니라면 어떤 바다생물도 괜찮을 듯 싶다.

그리고 거칠게 볶으며 살짝 익혀준다.

다 익히지 않아도 된다. 물을 넣고 끓이면 다 익게 된다.

해물은 많이 익힐수록 식감은 떨어지고 볼품도 없어진다.

이제부터 불은 가장 세게 한다.

 

 

5. 재료 주변, 냄비가 거뭇거뭇해지면서 타려는 기미가

보일쯤 뜨거운 물을 밑에 살짝 깔릴 정도만 붓는다.

그럼 자박자박한 느낌의 육수형태로 될 것이다.

재료에 맛이 깊게 배기 위함이다.

바글바글 끓기 시작하면 나머지 뜨거운 물을 다 붓는다.

 

 

 

6. 끓기 시작하면 라면을 넣는다.

뜨거운 물을 넣었기 때문에 금방 바글바글 끓을 것이다.

필자는 해장하기위해 콩나물을 함께 넣었다.

나머지는 라면끓이는 거와 똑같다.

 

 

 

7. 면이 익으면 먹기 좋은 그릇에 담아 맛나게 먹도록 하자.

 

서...설마..이게 어렵나? 그림으로 함 보자!

 

 

 

 

 

 

 

 

 

완성

사실 잊어버리고 좀 먹다가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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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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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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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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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특별한 힘이 있다. 울적한 마음을 위로하고, 오히려 더 우울하게 하기도 하며, 기분을 up되게 하기도 한다.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데 음악만큼 좋은 것도 없다.(이글을 쓰면서 치킨이 생각났다..ㅎㅎ왜일까?ㅎㅎ) 그 자극된 감성에 따라서 생각이 변한다. 생각이 변하면 행동도 변하게 된다. 그래서 음악은 대하기 쉽지 않은 것 같다. 

이 어려운 음악이 여행 중에 더욱 힘을 발휘한다. 어떤 음악을 들으며 여행하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확 달라진다.(이건 음식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나는 어떤 음악을 들으며 여행했을까?


내가 여행 중 음악을 듣는 이유는, 나중에 그 음악을 다시 들을때 혹은 우연히 들렸을 때 함께했던 시간과 공간이 느껴진다. 과거의 시점이 현재로 옮겨진다. 그 느낌을 다시 기억하고 싶어서 음악을 듣는다.


부다페스트에서 골목길을 걷다가 어느 음반가게를 발견했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들어가보기로 했다.(까막눈이라 읽을 수는 없다ㅜㅜ)


다양한 장르와 수많은 엘피판과 씨디가 있었다. 심지어 테이프도 있었다. 가게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허락을 받고 몇 장 찍었다. 더 찍고 주인 아저씨(?)랑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분의 표정이 '이 동양 남자애는 뭐지??'라는 표정이어서 다가가기 어려웠다.ㅠㅠ



내가 아는 노래들, 모르는 노래들 정말 많은 노래들이 있었다. 이 많은 노래들은 무엇을 노래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왜 노래하는지도..


나는 무슨 음악을 주로 들을까도 생각해보며 둘러보다가 음반가게인데 가게가 너무 적막이 흘렀다. 그래서 이것저것 고르다가 루이 암스트롱 엘피를 골라서 틀어줄 수 있냐고 했더니 흔쾌히 틀어주셨다.(지금 생각하면 조금 밝은 노래를 틀을껄 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이 여행이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노래를 들으며 가게를 둘러보다가 비틀즈 엘피를 발견했다! 누구나(?) 좋아하는(?) 비틀즈! (이 때 비틀즈의 노래를 들은건 행운이었을까?) 친숙한 노래들이 곁들어지니 더욱 신났다. 왠지 영국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음악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비틀즈!(얼마전에 폴 매카트니가 한국에!!!!! 왔었는데 가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ㅠㅠ)



오늘 얘기하고 싶은 노래는 존레논의 이매진이다.(지금까지 서론이었다ㅎㅎ) 적어도 이 글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들어본 노래일 것이다. 이 노래가 유럽여행을 하면서 나와 함께했다.



Imagine there i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s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may say that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이 노래가 유럽 여행을 하며 나와 함께였던 이유는 평소에 좋아하던 노래이기도 했고, 일단 멜로디가 너무 좋았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잡념이 아니라 하나의 시선으로 내 생각들을 모아줬다. 그 생각들은 '하나됨'으로 연결지었다.

이전까지는 몰랐던 이매진의 가사들이 새롭게 들렸고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나되는 세상이라니!!


우리가 사는 세계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그 시작을 존레논은 '천국과 지옥이 없는 것을 상상하자'라고 노래한다. '천국과 지옥'은 종교적 세계관으로 대표되는 하나의 키워드다. 가사에도 나오듯이 종교에서의 탈피를 노래한다. 종교 뿐만 아니라 국가의 경계도 허물어버리는 존레논의 이매진이다. 

우리 삶의 경계(종교, 국가, 윤리, 경제 등)의 기준을 무너뜨리고 하나가 되는 세상을 노래한다. 이것들이 있으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기준이 있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세계1,2차 대전으로 확실히 드러났다. 나와 다른 기준(=이데올로기)을 가진 사람은 '적'이다. 그리고 사람은 여기에 쉽게 현혹당한다.) 사람이 사람을 헤치고, 착취하고,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돌봄'으로 하나가 되자라고 노래한다.


존레논은 '언젠가 너도 우리와 함께하기를 소망한다'고 노래한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로 일어났고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다. 유럽을 가보니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살고있었다. 그들은 삶의 경계가 거의 허물어져있었고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것을 그들은 '존중'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이 존중받고 타인의 삶도 존중하는 삶을 살며, 이 가치를 유산으로 물려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점점 그들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고(신기하다. 너무나 개인적인데 공동체다.) 더욱 더 하나되기를 힘쓴다. 자기의 수입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는 나라도 있고, 실직자가 받는 보조금과 일용직 노동자가 받는 한달치 급여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 나라도 있었다. 그들은 '돌봄'을 실천하고 있었다. 한가지 예로, 신기하게 유럽의 많은 국가들에서 굶어죽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우리가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들은 '권리'로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삶에 대해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가 있었고, 남을 부러워 하지 않을 수 있는 '평등'이 있었다. 또 '신뢰'의 가치가 밑받침되어 있어서 이웃을 믿고, 특별히 국가와 국민 사이에 신뢰가 두텁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많은 세금이지만 아깝지 않고, 그 세금으로 국가가 하는 일은 국민을 위해 하는 일이었다.(최근 미국에서는 너무 많은 세금으로 인해 미국시민권자를 포기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미국과 유럽은 많이 다르다. 이것은 나중에 글을 더 쓰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걱정과 근심이 없는(적어도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는 않더라.) 아름다운 세상이 유럽이었다.(북유럽은 삶의 질 측면에서 지상낙원이라고 부를 정도로 만족도가 높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우리는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아직도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이용하고 착취한다. 돈이 세상을 움직이고 기근과 전쟁이 끊이질 않는다. 이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책은 없어 보인다. 

이 이야기의 해결책은 성경의 아브라함 이야기로 확인이 가능하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시작은 창세기 12장에서 출발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는데, 그 약속은 '나라'에 대한 약속이다. 그런데 이 '나라'는 그전에 먼저 창세기 11장에 나타나는 바벨의 이야기와 대조된다. 사람들은 홍수 사건 이후에도 악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홍수는 악한 사람들을 멸한 것이지 '악'을 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할 수도 있겠다.) 그 악한 마음은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만의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11장 1절은 당시 언어와 말이 하나라고 알려준다. (같은 말과 언어를 공유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의미다.) 이것을 통해 이들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고 그것을 영원히 기념하고자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에게 언어를 혼잡하게 하고 흩어버리신다. 그리고 그 도시는 멈춘다. 

창세기 11장의 나라는 노아 이후의 도시 건설로서(도시를 건설하는 일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저주와 중단으로 마쳐지는데, 창세기 12장의 또 다른 나라는 온 세계 민족의 축복이 된다고 선언한다. 그러면 이 두 나라의 차이점은 창세기 11장의 바벨 사건에서 세워진 나라는 순전히 인간의 힘으로 건설된 인간 왕국이며, 창세기 12:1절의 왕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서' 세우는 철저히 하나님 자신이 세우시는 나라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를 통해 '악'의 근원을 멸하실 것이다.


이야기는 흘러흘러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다. 지금 세계는 다른 언어로 흩어졌던 그들이 다시 하나되기 위해 모이고 있다. 각 사람이 살아온 삶을 통해(역사와 문화) 그동안 언어의 다름으로 인해 생겨났던 각자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를 추구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듯이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가 될 수 없다. 또 다른 '악'의 생산과 '중단'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Imagine'이 필요하다.


(계속)


WRITTEN BY
파다고기

,

 

 

가슴이 두근거려

널 만난 그 순간 기적 같아

꿈꾸는 너의 두 눈동자에 난 눈을 뗄 수 없었어

강렬하게 사로잡는, 너의 생각, 너의 신념, 너의 의지, 그 속의 너

 

이제껏 나 살았던 인생들 모든 걸 다 의심했던 순간

태양처럼 다가온 널 보면 그동안 나 얼마나 초라한지,

 

어쩌면 우리 처음 만난 날(우리 처음 만난 그 순간), 그 날에 정해졌던 운명.

이제야 알게 되었을 뿐, 지금 그 순간이 다가온 거야

날 위해 울지마, 이것만 약속해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함께 꿈꿀 수 있다면, 죽는데도 후회하지 않아(괜찮아, 행복해)

내가 가진 모든 걸 버리고 너의 그 꿈 속에 살 수 있다면 나..

 

네가 말해주는 미래가 내 앞에 펼쳐지지 않는다 하여도(해도)

어차피 그 날의 너를 만나지 못했다면

다시 사는 내 인생도 없었을 거야

 

너와 함께 꿈 꿀 수 있다면 죽는데도 괜찮아, 행복해

내가 가진(믿던) 모든 걸 버리고 너의 그 꿈 속에 살 수 있다면

나약했던 내 과거를 모두 잊고 너와 함께 새 세상을 상상할 수만 있다면 나

너의 꿈에 살고 싶어

 

※앙리 역은 박은태 배우와 한지상 배우의 더블캐스팅인데, 두 분이서 부르시는 가사가 조금씩 다릅니다.

저는 한지상 배우의 가사를 중심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박은태 배우가 부른 가사는 괄호안에 따로 넣어두었습니다.

앙리역의 박은태, 빅터역의 이건명이 출연한 프레스콜 무대 : https://www.youtube.com/watch?v=SICcvIB6gGE

제작발표회에서 부른 앙리역의 한지상 배우 : https://www.youtube.com/watch?v=3C8PR3GLjJw

 

 

 

 

0.

수능이 끝나기만을 바라던 고3 시절에, 눈여겨보던 뮤지컬이 있습니다. 손으로는 끊임없이 국어영역을 풀고 인터넷수능을 들여다봤지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뮤지컬이 있습니다(쓰고 나니, 자랑은 아니군요). 그러나 돈이 안 생겨 결국 못 보겠지 라며, 결국엔 포기하려던 뮤지컬이 있습니다.

그런데, 수능이 끝나고 원하던 대학에 붙지 하여 눈칫밥을 먹으며 살던 2월 초, 어쩌다 보니 돈이 생겼더랍니다. 혹시나 해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4명의 배우들(이건명, 한지상, 리사, 서지영)로 이루어진 날이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엄청난 확률로 딱 하루가 있었습니다. 당장에 예매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추가합격 통보를 받아 합격한, 원하던 대학에서 맞이한 첫 4월에, 당당히 프랑켄슈타인을 보러갔습니다. 이렇게 저의 프랑켄슈타인앓이가 시작되었습니다.

 

 

 

1.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의 기괴한 소설입니다. 하지만 소재만 따왔을 뿐, 내용 전개는 전혀 다릅니다(혹시나 해서 직접 읽어봄). 게다가 우리가 아는 그 거대한 못이 귀 위에 박힌 그런 징그러운 프랑켄슈타인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에, 침을 줄줄 흘려도 잘생기고 멋있는, 한지상 괴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법을 알아내어 생명을 창조한 미친 과학자가 아니라, 큰 눈을 가진 슬픈 소년의 과거를 간직한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나옵니다. 소설과 뮤지컬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주인공의 이름이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것과, 배경이 스위스 제네바라는 것입니다. 아마 공포영화를 생각하고 보시는 분이라면, 실망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2.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프레스콜 현장 촬영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MpaBaIbh4Ic : 빅터역의 유준상, 앙리역의 박은태)으로도 볼 수 있는 넘버 단 하나의 미래를 보면 뮤지컬의 흐름, 분위기를 대충 파악할 수 있습니다. 대강 말하자면, 생명에 대한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엎치락 뒤치락하는 내용의 노래인데, 빅터는 생명을 창조할 수 있으며 과학은 위기의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구원자라고 주장합니다. 그에 반해, 앙리는 과학은 생태계를 유지하는 도구이며 인간의 야망은 신의 영역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점점 둘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앙리는 빅터의 의견에 동의하기 시작합니다.

 

현재 과학은, 전쟁으로 인해 죽이는 과학 위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살리는 과학, 즉 생명의 주체자가 되어 생명을 되살리는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

 

결국, 앙리는 빅터의 의견에 동의하게 되고 그와 뜻을 함께 하게 됩니다. 그 목적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둘은, 함께 연구를 하면서 친구 그 이상의 관계를 쌓게 됩니다.(왕용범 연출은, 두 사람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지칭하였습니다.)

 

그런데, 연구를 하던 중 갑자기 앙리가 처형 위기에 처합니다. 이유인 즉슨,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질러버린 친구 빅터를 대신하여 죄를 뒤집어 쓴 것이었습니다. 빅터는 자신의 죄라고, 자신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호소했지만, 미치광이로 찍힌 빅터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습니다. 빅터는 결국 감옥에 있는 앙리를 찾아가, 사실대로 말하고 자신이 죗값을 담당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앙리는 말합니다. “니가 살아야, 우리 연구 계속 할 수 있잖아.”

 

그리고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친구야, 우리 처음 만난 때 생각난다.”

3.

그리고 이 장면에서 불려지는 노래가 너의 꿈속에서입니다. 이 노래가 끝나고 앙리는 처형되니(스포일러 죄송), 앙리의 유언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그만큼 가벼운 노래가 아니고,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동시에 아름다운 선율과 의지에 찬 확신 있고 힘 있는 가사를 가지고 있어서, 한국의 This is the moment라고 불리기도 하더랍니다.(출처는 명확하지 않습니다만^^;;)

 

사실 이 노래의 맥락이 되는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에서 설정된 세계관을 빼고 본다면, 프로포즈 송으로도 불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이 노래의 화자는 청자에게 엄청난 확신과 신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로 인해 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너와 함께 꾸는 그 꿈을 난 너무나도 신뢰하고 사랑한다. 설령 그게 눈 앞에 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얼마나 청자로 하여금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고백인지요.

 

이 노래를 부르는 중 빅터는 눈물을 보이는데, 아마 이러한 고백이 너무 감사하고 그러한 친구를 곧 잃는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일 것입니다.

 

4.

 

이 고백은, 단순한 의견의 일치에서 나올 수 있는 고백이 아닐 것 입니다. 저는 두 사람이 연합된 관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연합은,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이 서로 합동하여 하나의 조직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 연합된 두 사람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가 한 마음 한 뜻으로, 한 목적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연합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는 사람들로는 누가 있을까 생각하던 중에, 작년 겨울 제가 정말 좋아했던 프로그램 더 지니어스 3 : 블랙가넷이 생각났습니다. 혹시 보신 분 있으신지요? 

 

 

5.

더 지니어스는 시리즈 프로그램입니다. 각 시리즈 마다 룰은 조금 다르지만, 전체적인 룰은 같습니다. 매 회차마다 여러명이서 게임을 진행하고 매 회차마다 한 사람씩 떨어지는데, 이 게임이라는 것이 얄궂어서 고도의 심리전과 두뇌전을 수반하는 룰의 게임입니다. 대부분의 게임들이 연합과 배신을 동시에 잘 사용해야 하는 게임들이라서, 단체전 같지만 개인전 같은 게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각 회차마다 여러 게스트들 사이의 필요에 따른 연합이 생성되고 파산되고가 반복되었는데, 보통 2회차를 넘긴 연합이 많지는 않았다고 합니다(전 시즌 12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지니어스 시즌 3에서, 6회부터 마지막 12회까지도 계속 된 연합이 있었으니, 그것은 장동민(30대 중반의 개그맨)-오현민(20대 초초초반의 대학생)’, 이른바 쌍민 연합이었습니다.

 

이 콤비는 좀 특별하였습니다. 처음 결성된 6회 때 부터, 장래를 예약하였습니다. 둘은 같이 결승전에 오르기라는 목적을 가지고, 매회 같이 플레이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결승전까지의 보험, 어떻게 보면 불가침 조약이라고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 회마다 게임이 진행되고 같이 플레이를 해나가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완전히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오현민은 후에 말하기를, ‘처음에는 50%로 시작한 신뢰가 나중에는 200%로 쌓아 올려졌다고 하였습니다. 한 번은, 오현민이 맘 먹고 장동민 뒤통수를 치면 1등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오현민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후의 자신 말로는, “갑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장동민을 배신하기에는 그동안 너무 많은 정을 준 거 같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과연 실제 사회로 와서도 저 둘이 연합할 수 있을지, 그리고 또 다시 만나게 될 더 지니어스 4’(두 사람은 더 지니어스 4의 라인업에 올랐습니다)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아직 모르지만, 우승을 위하여 배신과 거짓말이 난무하는 더 지니어스에서 정말 보기 힘든 아름다운 조합이었습니다.

 

전 시리즈 더 지니어스 2’에서는 여러 출연자들이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였는데, 그 때 보다 훨씬 재미도 있었고 볼 만하였다는 것이 시청자들의 평이었습니다. 후에 결승전에서는, 쌍민 연합이 결승전에 올라간 것만으로도 소원을 성취했다며, 누가 이기든 둘 다 응원하고 싶고 서로가 정정당당하게, 즐겁게 게임 그 자체를 플레이하길 바란다는 의견도 다수였습니다(그 중 한명). 사람들은 자극적인 재미보다, 서로를 인격체로 대우하여 사랑하는 즐거움을 더 좋다고 평가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6.

다시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빅터의 의견이 결국 옳은 의견이었는가, 거기에 동조한 앙리는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가에 대한 문제는 다루지 않고 싶습니다. 빅터의 생각은 누가 보기에도 끔찍한 결과를 결국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는 적어도, 빅터 프랑켄슈타인보다는 더 나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우리는 더 나은 세계의 도래가 끔찍한 창조를 통하여 온다고 생각하고 있진 않기 때문입니다그런 우리에게 앙리 뒤프레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헌신은 많은 영감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이상이 반드시 있을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모인 공동체도 있을 것이고요. 그런데 이것은 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만, 그들과 완전히 연합하고 있습니까?

학교가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는 지금, 학교를 위하여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얼마전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장 학교에서 결산감사가 진행된다고 하니, 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그냥 지나치려 하는 제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이토록 완악해서, 생각은 잘 할뿐이지 행동으로 옮기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생각은 정말 간절한 생각이 아닙니다. 저는 학교의 의를 위하여 노력하고자 하는 그들과 연합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동안 학교에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한 제 자신이 부끄럽고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연합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우리 생각에서만 그려지는 것이 아닌지요. 생각은 줄기차게 하는데, '행동으로 옮기자니 생기는 그 귀찮음'과 '현실의 그 넘어보지 않고도 넘기 힘들다고 가정해버린 벽' 앞에 항상 지고 있지는 않은지요. 지금 우리는, 진정으로 연합하고 있습니까?

 

 

 

 

 

- 좀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직 6월 2일 안되었으니, 세이프..?


WRITTEN BY
파다고기

,





2. 착한 그대 : 고난받는 씨알

 


착한 그댄 실패들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없어요

곱이곱이 시련마다 

선택의 지혜가 쌓이죠



  착한 그대들이란 '씨알'이다. 이들은 눈에 뚜렷이 드러나는 '빛남'이나, 다른 사람들의 노동력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힘'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함석헌은 <뜻으로 보는 한국역사>에서, 역사 선생으로서 이 나라에 대해서 무언가 대단하게 드러내 보일만한 것이 없어서 속상했던 때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럼 이 나라에 정녕 아무 것도 없느냐, 그렇지 않다. 고난받는 씨알이 있고, 이들이 이 나라의 주체다. 함석헌은 이 나라를 '수난의 여왕'이라 부르며, 고난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창조될 것이라는 소망을 붙들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도 비슷한데, 400년이 넘는 포로기 역사 속에서(우리나라가 36년간 식민지 생활했던 것의 12배다)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왔던 것은 포로로 끌려갔던 귀족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포로로 끌고갈 가치도 없어서 그 땅에 버려졌던, '땅의 사람들'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오늘날 유대인들의 뿌리가 되었다. 실패들을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살몸에 새겨넣는 '착한 그대들'이다. 이들의 고난 속에서 지혜가 날마다 쌓여감은, 이를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낳기 위해서다. 


  이 고난의 시대가 앞에서 말한 '현시대'다. 이 시대가 그런 시대다. 착한 그대들이 고난받을 수 밖에 없는 시대. 씨알이 말하는 질서와 권력이 말하는 질서는 다른 것 같다. 그렇다면 누가 참 질서 안에 서 있는가?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저들이 질서인가? 아니 씨알은 권력을 넘어선 더 큰 질서(아르케)를 안다. 몸으로 안다. 시련 속에서 소망할 수 있음을, 논문으로 써낼 수는 없어도 마음으로 안다. 이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현시대 속에서 착한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현시대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은 온통 돈과 힘이 이기는 약육강식 뿐인데, 그 속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읽기가 피어난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그리고 바로 고난 받는 씨알의 속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읽기에서부터, 현시대가 아닌 새로운 시대가 피어나고 있다. 이 말은 수사가 아니라는 점을 미리 밝힌다. 새로운 시대가 피어나는 것은 엄연하고, 장엄한 현실이지, 말로 끝낼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는 말이다. 그 이유는,



3. fly는 진실로 확실하다! 



fall to fly 



  어쩌면 이 한 줄 가사를 위해서 이 글을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곡이 상투적인 희망노래로 들리지 않는 것은 저 가사 때문이었다. fall. 이 단어를 기독교 신학에서는 '타락'이라 번역한다. 나는 '곤경'이라 쓰고 싶다. 오늘날 인간이 처한 곤경이 'fall'이다.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진리를 알아도 그 진리대로 살 수 없는 작심삼일의 상태. 욕망에 끌려 중요한 것을 습관적으로 놓치는 상태. 그리고 이 상태가 인류 전체를 감염시켰다는 현실이, 오늘 우리가 처한 곤경의 정체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은데, 저 진리를 알지도 못한다는 곤경이다. 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할 줄도 모르며, 이것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다. 그래서 우리 속에서 진리는 우리의 삶과 '달리' 배우기만 하는 것이 되었다. 줄창 배워도 할 수 없고, 심지어 알 수도 없다는 점이 충격적이지 않은가?


  이것을 '악'이라 부르자. 우리는 지금 악의 상태에 빠져(fall)있다. '지정의'의 추락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악에 대해서 물어왔다. 왜 우리는 이러한 상태에 놓여있는가? 왜 우리는 이러한 곤경을 맞게 되었는가? 허나 나는 우리가 왜 fall 되었는지보다 우리가 어찌 fly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왜 악이 존재하는지를 숙고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질문은, '우리는 정말 fly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고난과 곤경을 극복할 수 있을까?'의 물음이다. "'왜' 이 사람이 선천적으로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불행을 겪게 되었습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눈을 뜨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답변을 주셨다. 어? 내 생각이 틀렸다. 예수의 답변은 '어찌 fly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도 아니었다! 나는 곤경을 어찌 해결할지를 얘기하자는 방향으로 글을 쓰고자, 이 생각난 이야기를 인용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 속 진실은, 예수가 최종 목적으로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을 뚜렷이 드러내는 것'이었고,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게 되는 것은 그 최종 목적을 위한 과정으로서 정말 당연한 수순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fly를 정말 믿고 계셨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달리. 의식하지 못한채로, fly를 먼 미래로 밀어놓았던 나와 달리, 그에게 fly는 '지금'이었고, '이제'였다. 고민과 논쟁이 아닌 당장의 실천이었다. 

  아, 이리도 모른다. fly는 안되니까 고민하는게 아니라, 당연한 거니까 고민하는 것이다. 고민 끝에 답을 내릴 문제가 아니라, 이미 답이 나온 문제다.


  그래, 생각을 고쳐먹는다. fly!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fall과 fly를 연결하는 저 'to'는 시간의 흐름을 뜻한다. fall이 시간이 흐르면(to), fly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경우 시간의 흐름을 뜻하는 to는 단단한 'to'다. 반드시 이뤄지는 'to'다. 그래서 목적이나 결과로 해석되는 것이다. 나 우리, 아니 나의 to는 불안하기만 하다. 'fly'를 신뢰하지 못한다. 실패할 것이라 생각한다. 안될 것이라 지레 겁먹는다. 이것은 현시대의 징후다. 나는 올바른 것을 올곧이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거기에 내 모든 것을 걸지 못하고 주저하면서도, 아파한다. 왜 곤경을 극복하는 것을 fly라는 단어를 써서 표현했을지를 생각해보라. fly라고 해서 이승환이 성층권을 뚫고 날아오르길 바라는 것은 아닐것이다. 만일 fly가 이 대지 위에서 발을 떼고, '이 더러운 세상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개인주의적 도피'이지 착한 그대들이 겪는 곤경에 대한 해결이 될 수 없다. 만일 정녕 그러하다면 고비고비 시련마다 선택의 지혜를 쌓을 필요도 없을테니 말이다. 날아오름은 곤경의 극복이다. 그런데 왜 하필 날아오름이냐. 날아오름은 인간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반대 가치들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언가 가치를 추구해야만 살 수 있다. 그런데 대개 '날아오름'에 반대되는 가치들을 추구한다. 이른바 날아오지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잡는 '땅의 가치'들, 자꾸 땅에 붙어있고 싶은 악한 관성이다. 리차드 포스터가, '돈, 권력, 섹스'라고 말했던 그러한 가치들. 거기에 집착하는 바람에 곤경에 스스로(아주 능동적으로) 빠진다. 혹은 김남준 목사가 말했던 '게으름'. 이 악한 관성은 작심삼일과도 밀접한 상관이 있어서, 결국 인간이 올바른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 fly는 이것으로부터의 자유, 날아오름, 곤경의 극복이다. 발을 땅 위에 단단히 붙인채, 내 발에 붙은 지구와 함께 날아오르는 것이다. 


  쓰다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날아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땅의 가치 때문이다' 맞는 말이지? 그런데 이 말은 어떤가? '우리가 땅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유는 날아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맞는 말 같다. 소망없는 현시대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양자택일만이 주어졌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땅의 가치 때문에 날아오르지 못한다고 투정부리는 쪽인가, 아니면 날아오르는 건 없으니 땅의 가치를 추구하는 게 현실적이라 생각하는 쪽인가? 


  가치의 영역에 진공상태는 없어서, 사람에게 아무런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헛된 가치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정말 올바른 가치를 붙잡았다는 뜻이다. 날아오른다는 확신을 얻지 못하면, 저 양자택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어설픈 도덕주의와, 매정한 현실주의 사이에 솟아오르는 길은, 정말 날 수 있다는 확신과 그 확신을 심어주는 탄탄한 근거다. 역사적 근거. 

  이 말은, 그럼 우리는 정말 곤경이 극복될 것을 신뢰해도 된다는 말인가? fly할 것을 믿고, 오늘 우리의 fall을 바라봐도 된다는 소리인가? 만일 이것이 정말 확실하다면, 우리는 fall한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fly를 자연스럽게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신뢰해도 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우리는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한 fly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땅의 가치들에 묶인 정도가 아니라, 땅에 집어삼켜졌다가 다시 fly한 한 사람을 알고 있다! 내 블로그를 자주 왔던 사람들은 알겠지. 그렇다! 예수의 부활이다! 그의 부활은 결국 이 세상의 곤경을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표명이요, 그것이 실제로 이뤄짐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니 'fall한 것들이 반드시 fly할 것임을 믿는다'는 말의 정체는 부활에 대한 신뢰다. 그럼 fall과 fly 사이의 to의 굳건함은 신의 굳건함이 된다. 이런 말이 우습지만, 속고 속이는 사람보다 훨신 믿음직스러운 굳건함이다. fly가 드러났으니, 신의 뜻을 단디 붙잡고, fall을 극복해 나간다. 예수의 말 속에서 볼 수 있던 것처럼 fly는 당연한 것이고(오히려 과정이며), 그 fly를 통해 사람을 사람답게, 세상을 세상답게 하시는 한 분이 드러날 것이다. 이것이 세상 모든 fly의 결말이다. '하나'가 드러날 것이다. 


  fall to fly. 그래서 나는 이것이 세례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사람과 세상이 새로워질 것을 믿는 이가 세례를 받고 공동체로 들어온다. 그는 가라앉았다가 올라온다. 곤경에 처한 나는 죽고,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fall to fly를 믿고 살겠다는 온 몸을 던진 다짐이다.


(계속)




WRITTEN BY
파다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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